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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인원으로 올인원

초보 러너의 러닝템

by 파슈하

나에게는 묘한 징크스가 있다.


2017년쯤엔가, 18년 즈음엔가. 갑자기 집에서 만들어 먹는 파스타에 꽂힌 적이 있었다. 매 끼 점심으로 파스타를 먹는데 질리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내가 파스타를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이었던가?' 나도 모르는 나의 취향을 발견한 것보다는, 매일 점심메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이 더 컸다.

일주일에 한 번씩 파스타면을 사는 것이 꽤 귀찮아졌기에 이렇게 파스타를 자주 해 먹을 거라면 대용량 제품을 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얼마 뒤에 대형 창고형 마트에 갈 일이 있어서 그곳에서 파스타 6묶음짜리 제품을 구매했다. 항상 먹던 것과 같은 브랜드였다. 그리고 파스타가 3묶음쯤 남았을 때,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파스타에 딱 질려버린 것이다.


비슷한 일이 2020년에도 있었다. 우연히 마트 코너에서 과일식초를 마셔보았는데 그 맛이 대단히 좋았다. 차가운 탄산수에 얼음과 함께 마시니 입 안은 물론이요, 몸속까지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식초의 효능이 어쩌고는 둘째 치고서라도 입맛에 매우 잘 맞았다. 한 병을 비우고 또 마트에서 기웃거리니 이번에는 1+1 행사란다. 맛도 다양하게 있는데 교차로 선택해도 된다길래 기쁜 마음으로 흔쾌히 두 병을 사서 돌아왔다.

두 병을 다 마시고 나니 이번에는 다른 맛이 궁금해졌다. 석류맛, 사과맛, 파인애플맛, 포도맛... 맛있게 먹었던 두 가지 맛에 새로운 맛 두 가지를 더해서 구입했다. 네 병이나 있었지만 그 또한 맛있게 해치웠다. 이쯤 되면 좀 더 저렴하게, 대용량으로 구입해도 될 것 같았다. 인터넷에 뒤져보니 다섯 가지 맛이 두 병씩 들어있는 패키지 제품이 있었다.


"이렇게 잘 먹을 거면, 대용량으로 사는 게 싼 거라니까."


아니었다! 대용량으로 사자마자 딱 4병 먹고 났더니 기적처럼 식초 신 냄새가 비릿하게 느껴졌다. 물려버린 것이다. 어쩜 이렇게 한결같을 수 있을까!



미리 마련해 두면 이상하게 하기 싫어지는 아이러니. MBTI검사를 했을 때도 J로 나오는 계획형 인간이건만. 이상하게도 탄탄히 준비를 해 놓으면 하기 싫어지는 청개구리의 후손.


비단 먹을 것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잘 쓰는 로션도 1+1으로 산다면? 어쩐지 두 번째 통은 쓰기가 싫어지고 만다.

뿐만이 아니다. 헬스장을 등록하겠다고 미리 운동화를 사 두었던 게 딱 작년 6월쯤이었나. 그런데 아직도 헬스장 근처도 가보지 않은 것이다. 흠흠.






운동을 시작할 때 좋은 장비나 예쁜 운동복을 구입하는 것으로 의욕을 끌어올리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최근 슬로우러닝에 관심이 생겨서 검색 조금 하고 영상 몇 개 보고 났더니 알고리즘이 러닝용품 추천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하지만 무언가를 구입하는 순간 괜히 운동에 질려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자꾸 들었다. 지금 일 년째 신발장에서 끈이 묶이지도 못한 채 잠들어있는 저 운동화를 보라. 간신히 불타오른 운동에 대한 의지를 이렇게 날려버릴 순 없었다.


그래서 그냥 입던 티셔츠에, 입던 바지에, 신던 운동화를 신고 공원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냥 천천히 뛰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할 만했다. 다음날에는 뛰기 전에 핸드폰 기본 헬스 어플에 있는 '달리기' 버튼을 눌렀더니 내가 몇 킬로를 몇 분만에 달렸는지 체크까지 해 주었다.


요즘에는 운동할 때 스마트 워치는 필수인 것 같다. 줄 없는 무선 이어폰도 많이 쓰는 것 같다. 아직 둘 다 마련하지 못한 나는 그냥 핸드폰을 손에 쥐거나 주머니에 넣고 손목과 귀는 비워둔 채로 달린다. 요즘 수원에는 새소리가 유난이다. 그중 까마귀가 제일 특출 나긴 하지만... 의욕을 끌어올려주는 신나는 음악도 좋지만 그냥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래도 마음먹었을 때 집 근처에 달릴 수 있는 공원이 있다는 것이 어디냐. 비록 내가 정확하게 몇 보를 걷고 뛰었는지, 심박수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체크해 주는 기계는 없지만.


슬로우러닝의 경우 220에서 나이를 뺀 심박수를 기준으로 하거나 최대 심박수에서 60~70% 정도를 유지하면 된다고 하는데, 심박수를 도대체 어떻게 알까. 다행히 나처럼 맨몸으로 운동하는 사람들을 위한 팁도 있다. 대화를 하면서 뛸 수 있는 정도면 된다고 한다. 괜히 숨찬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면, 혼잣말을 해 본다. 말을 할 수 있네? 통과. 쉽다 쉬워.


요즘에 러닝이 정말 유행인지, 집 앞 3분 거리의 공원에도, 5분 거리의 공원에도, 10분 거리의 공원에도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정말 많다.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달리는 사람이 참 많다. 헬스장용 운동화가 신발장에 모셔져 있던 시절에는 몰랐는데, 정말 많다. 이제는 나도 참전한다.


마침 여름에도 겨울에도 입을 수 있는 반팔 기능성 티셔츠도 있고, 잠잘 때도 외출할 때도 입는 착용감 편한 까만색 긴 바지도 있다. 아스팔트를 달리든 흙길을 달리든 때가 잘 타지 않는 적당히 푹신한 운동화도 있다. 셋 다 내가 골랐지만, 참 잘 골랐다. 이 물건들을 고를 때 나는 무의식 중에 '언젠가 이렇게 달리기를 할 수도 있겠지'의 경우도 생각해 두었던 것 같다. 새로운 아이템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할 순 있었다. 누군가는 그게 또 러닝의 장점이라고 한다.



공원에서 뛰고 있으면 다양한 속도로 뛰는 사람들을 만난다. 누구는 나처럼 천천히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뛰고 있고, 누구는 거의 전력질주에 가깝게 뛰고 있다. 나는 초보이니만큼 그들 중에서 제일로 천천히 뛰고 있다. 걷는 속도와 진배없다. 하지만 앞사람이 피치를 올린다고 그 속도를 따라가다간 무릎이나 발목에 부상을 입을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미니멀라이프도 참 그렇다. 남들이 버린다고 따라서 버리거나, 남들이 하얀 바구니로 팬트리를 채워놓았다고 무턱대고 따라 샀다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채 돈과 시간만 날릴 수도 있는 것이다. 나만의 방법과 속도를 찾아야 탈이 나지 않는다.


러닝 며칠 했다고 이제는 조금 익숙해져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뛰는지 관찰하게 된다. 햇빛이 강할 때는 챙 있는 모자를 쓰면 좋을 것 같다. 지금이야 괜찮지만 만약 겨울에도 계속 달리기를 한다면 적당한 긴팔 운동복 정도는 마련해 두어도 좋을 것 같다. 지금은 비록 2킬로미터대까지밖에 못 뛰지만 5킬로를 넘게 뛴다면 내 발에 더 잘 맞는 러닝화를 구입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핸드폰을 거치할 수 있는 러닝벨트도 좋겠다. 조금 더 전문적으로 나의 운동스킬을 늘리고 싶다면 스마트 워치를 사도 될 것이고, 뛰는 시간이 길어져서 지루하다면 무선 이어폰을 사도 될 것이다.


이게 무슨 운동계획인지 쇼핑리스트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계획은 그렇다. 하지만 초보 중의 초보인 지금으로서는 그냥 갖고 있는 올인원템들을 한 자리(one)에 모두(all) 모아두기(in)만 해도 참 괜찮은 것 같다.


#오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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