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추석 연휴 내 비가 오더니, 그만 가을로 접어들고 말았다. 10월 초만 해도 반팔을 입어야 해서 끝나지 않는 더위가 야속했는데, 막상 쌀랑해진 바람을 맞아보니 세월이 아쉽다. 사람이 이렇게 양가적일 수가 있을까.
덕분에 아껴왔던 '그 옷'을 옷장에서 꺼낼 수 있었다. 지금 같은 간절기에는 이게 딱이다. 여름엔 에어컨 바람막이로써 봄가을엔 그 자체로써 쓸 수 있는 셔츠 같은 것 말이다.
면 50%, 레이온 30% 혼용률로 구김이 잘 가지 않을뿐더러, 차르르 흘러내리는 핏 덕분에 블라우스로 보일 때도 있다. 아주 얇고 디자인이 서로 다른 천이 앞뒤로 붙어있는데 한쪽은 진중한 회색, 다른 쪽은 커다란 체크무늬다.
그날의 기분이나 바지 디자인에 따라 앞뒤로 뒤집어 입을 수 있어서 옷걸이는 하나만 쓰면서도 두 벌을 소유한 듯한 매력이 있다.
이번 여름엔 일교차가 큰 날이 없어서 제대로 입지 못했다만,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지금이야말로 이 셔츠의 제철이다. 요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목 끝까지 단추를 잠그는 것을 추천하고, 햇볕이 유난인 날에는 목 위 단추를 한 두 개 풀러 주면 좋다.
겨울이라 해도 이 셔츠는 서랍장 속으로 동면하러 가지 않는다. 다른 옷과 함께 입으면 굳이 니트를 찾아 입지 않아도 목 끝까지 따뜻해진다. 음악회나 어른들을 만나는 자리에는 회색깃이 보이게 해서 검은 맨투맨과 함께 입으면 적격이고, 쇼핑하러 가거나 친구들을 만날 때는 체크무늬 깃이 보이게 해서 회색 카디건과 입으면 찰떡이다.
그래서 일 년 내내 활용할 수 있는 이 기가 막힌 셔츠의 판매처가 어디냐면?
없다.
이건 내 상상의 옷일 뿐이니까.
나의 어릴 적 꿈은 발명가.
답게, 당시 초등학생의 나에겐 발명 노트란 것이 있었다. 지금은 잃어버려서 그 발명품들을 자세히 톺아볼 수는 없지만 대충 이런 것들이 있었다ㅡ비디오가 합쳐진 귀여운 디자인의 작은 텔레비전, 자로도 쓸 수 있는 형광펜과 큰 지우개가 달린 샤프펜슬.
비록 발명가는 근처에도 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물건들의 새로운 쓰임새를 발견하여 올인원 제품으로 만드니 이제는 '발견가'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리버시블 사계절 셔츠'같은 것은 있는 옷으로 대체할 수도 없거니와, 일단 이런 셔츠를 세상에 만들어 파는 사람이 없다. 내가 봐도 공임이 너무 복잡하니 내 스스로 옷을 지어 입을 수 있다 해도 쉬이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따라서 완벽한 <올인워니스트>가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요즘엔 세상이 참 좋다. mp3와 디지털카메라를 따로따로 들고 다니던 시절만 해도 사람들 전부 올인원 제품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요즘 시대에는 양우산은 기본이요, 캠핑용 다용도 멀티툴까지 절찬리 판매되는 시대다. 올인원 제품이라고 성능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스마트폰에서 이미 입증했다.
다만 나는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다용도로 쓰고 싶은 마음이 강하기에 더 많은 올인원 제품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특히 의류 같은 경우에는 올인원에 참 야박하다. 가끔 미니멀라이프 책에서는 양면으로 입을 수 있는 셔츠, 탈부착이 돼서 내피 외피 따로 입을 수 있는 코트 같은 것들이 나오지만 실제로 내 주변에서는 그런 옷들을 찾을 수가 없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상상력을 펼치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티셔츠 한 벌을 다용도로 쓰면서, 신발 한 켤레 잘 골라 여기저기에 잘 매칭해서 신다 보면 이것 또한 괜찮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니멀리스트는 단순히 물건을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들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필요 없는 것들을 비워내다 보면 여백이 주는 안온함에 취해 자꾸 빈 공간을 수집하고 싶어 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와중에도 물건들이 주는 '편리함'은 포기하기 아쉬웠는데.
그럴 때마다 나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건 올인원 아이템들이었다. 어떤 물건들은 아주 작은 생각의 전환만으로 내가 수많은 물건을 갖고 있는 이점을 누리게 해 주기도 하였다.
4색 볼펜, 올인원 비누처럼 부피를 절대적으로 줄여주는 물건도 있었고 이불, 식탁처럼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다용도로 쓸 수 있는 물건도 있었다. 겨울패딩이나 신발 같은 것들은 올인원으로 사용하고 싶어서 부지런히 손품 발품 팔아 괜찮은 물건을 찾아야만 했다.
아직 소개하지 못한 올인원템도 있고 더 발굴하고 싶은 올인원템도 있지만, 나만의 올인원 아이템들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는 연재글은 일단 여기서 마무리짓고자 한다.
하지만 나의 레이더는 아직 죽지 않았다! 만약, 정말 기가 막힌 올인원템을 발굴하게 된다면, 그래서 나의 여유 공간은 더 넓어졌으나 삶의 질을 상승시킨 그런 보물 같은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 때엔 브런치 매거진을 통해 소개드리도록 하겠다.
지금까지 저의 물건 자랑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