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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립 Jan 26. 2023

10. 프랑스 예술학교의 위엄

2012년 9월, 발렁스


리옹 남쪽에 위치한 프랑스의 작은 시골 도시.

교통수단은 버스 하나, 시내도 하나뿐인 이 아담한 도시가 앞으로 내 유학생활이 시작될 발렁스라는 곳이다. 합격 통보를 받은 후에 미리 제니퍼와 도시를 사전 탐방하며 지낼 집을 구해놨었다. 도시 중앙에 위치한 나름 큰 집이었고, 한국인 학생과 같이 룸메로 지내게 되었다. 나이는 나보다 어렸지만 1년 먼저 입학을 한 선배였기에, 학교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들으며 집 계약을 마치고 입학을 준비했다.


9월이 되고 학기가 시작되었다. 작은 도시에 비해 꽤 현대적인 양식으로 지어진 발렁스 예술 학교는, 아트와 디자인, 두 가지 옵션(과)으로 나뉘어있고, 1학년은 정해진 옵션 없이 여러 가지 작업을 하며 본인에게 맞는 과를 찾아가는 리서치 과정이었다.

올해 신입생으로 들어온 학생들은 대략 50명 정도였다. 나를 포함한 한국인 학생이 6명이나 되었고, 그 외에 그리스, 아르헨티나, 대만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다. 물론 대다수는 프랑스인들이었다.

아트 스쿨 학생답게 전부 개성 있게 생긴 신입생들 사이에서 나는 조금 주눅이 들었다. 더 이상 외국인들을 위한 느릿느릿한 불어 설명 따위는 없었다. 아무리 그동안 어학원에서 날고 기었다 한들, 나는 그저 훈련병에 불과했고, 이제는 정말 실전에 투입된 느낌이 들었다.


첫날은 학교 전체를 투어 하는 일정으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하는 프랑스인만큼, 학교에 구비되어 있는 장비와 지원시설이 정말 어마어마했다. 전부 아이맥으로 깔맞춤 한 컴퓨터실과 학생 개개인의 작업 아뜰리에는 기본이고, 사진 촬영용 포토 스튜디오, 사운드 작업용 오디오 스튜디오, 그리고 카메라나 마이크 같은 미디어 장비까지 전부 갖춰져 있었다. 

인쇄실에는 전통방식의 금속활자부터 대형 옵셋 인쇄기, 판화실, 실크 스크린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인쇄술을 시험해 볼 수 있었고, 종이 재단기, 제본기처럼 책을 제작할 수 있는 장비도 있었다.

학교 뒤뜰에 있는 목공소에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나무 재료들이 잔뜩 쌓여있었고, 테이블쏘 (테이블 위에 톱날이 있어 나무를 쉽게 절단할 수 있는 장비) 같은 전문 기계들도 있었다. 목공소에서 내가 원하는 사이즈의 프레임을 제작하고 학교에 미리 구비되어 있는 캔버스 천을 달아 나만의 액자를 만들 수도 있었다. 

이쯤 되면 이곳은 천국이었다. 진심으로 학생들에게 아무런 장비, 돈 걱정 없이 원하는 작업에만 마음껏 몰두할 수 있게 해주는 구조였다. 비싸게 걷는 세금들을 이렇게 아낌없이 교육에 투자하는 걸 보니 무섭기까지 했다. 왜 프랑스가 예술 강국인지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꿈꾸던 전문장비들을 가지고 빨리 여러 가지 재미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마구 차올랐다.

이곳에선 내가 좋아하는 영상 작업도, 사운드 작업도, 책 제본 작업도 마음껏 해볼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만화든, 소설이든, 음악이든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드는 걸 좋아해 왔던 나에게는, 그동안 쌓여있던 창작 욕구를 실컷 배출할 수 있는 이곳이 마치 놀이터 같았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룸메 동생과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작업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럽 만화 광팬인 그의 책장에는 처음 보는 프랑스, 이탈리아 만화책들이 꽂혀있었고, 독특한 스타일의 만화를 읽다가 같이 기타도 치고,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가 단편 영상을 촬영하기도 했다.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이 예술의 소재 같았다. 모두가 예술에 진심인, 그 누구라도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이곳 프랑스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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