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발렁스
학교 오리엔테이션 과정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프로젝트와 함께 학기가 시작되었다.
1학년 수업은 회화, 공예, 데상 등의 아트 수업과, 멀티미디어, 인쇄술, 영상 등 디자인 성향의 수업이 골고루 섞여있었고, 학교의 전반적인 시설들을 하나씩 다 체험해 볼 수 있는 식으로 구성되었다.
그럼에도, 누가 프랑스의 예술 학교 아니랄까 봐 과제들은 모두 아트적인 색깔이 매우 강했다. 뒤늦게 알고 보니 발렁스 보자르는 꽤나 개념적인 성향으로 유명한 학교였고,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상업적인 작업은 꿈도 못 꾸는 분위기였다. 프로젝트 때마다 영감을 받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폭넓은 리서치가 전제되어야 했으며, 주기적으로 교수와 헝데부 (rendez-vous: 약속)를 잡고 작업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내가 하려는 작업 방향에 대해 설명할 때마다 교수들은 상당히 디테일한 부분까지 깊게 캐물었고, 이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충분한 자료 조사가 필수였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밑천이 드러나 버렸고, 서로에게 상당히 어색한 시간이 찾아왔다. 평소 상업적인 디자인이나 애니메이션 작업만을 좇아오던 나에게는, 난생 처음 듣도 보도 못한 현대 미술 작품들과 아티스트들을 공부하고 교수들 앞에서 발표해야 하는 이 시간이 꽤 고역이었다.
프로젝트의 주제 또한 난해해서 이게 대체 뭘 만들라는 건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주제에 대해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창의력을 펼치기에는, 난 그동안 한국의 주입식 교육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예를 들어 초상화를 표현하라는 주제가 있으면 아무런 의심 없이 물감을 짜서 캔버스에 내 초상화를 그리는 식이었다. 그러다 다른 학생들은 어떤 식으로 그리고 있나, 작업하는 모습들을 기웃거려 보면, 그라피티를 그리는 친구, 집에서 장신구들을 가져와 꼴라쥬를 만드는 친구, 책에서 여러 글귀를 잘라와 자신에 대해 표현하는 친구 등 다양한 접근 방식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해도 되는 거야?'
라고 물어보면 늘 한결같이 돌아오는 답변은,
'Pourquoi pas? (왜 안 되겠어?)'
그렇게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창의력을 펼치는 어린 학생들에 감탄하곤 했다.
한국의 중간/기말고사처럼 프랑스 학교도 겨울에 중간평가, 봄에는 기말평가가 존재한다. Bilan이라고 불리는 마지막 기말평가에서는 학년 최종 평가가 이루어지며, 합격 여부에 따라 다음 학년 진학 또는, 유급이 결정된다. 유급이 될 경우 그 학년을 1년 다시 반복해야 하며, 체류증 연장에도 불리한 영향을 끼친다는 소문이 있어 유학생들에게는 가장 피하고 싶은 결과였다.
겨울이 되고 연말, 어느새 프랑스에 온 지도 1년이 지났다.
낯선 주제에 익숙하지 않은 내 작업들은 번번이 교수들의 지적을 받곤 했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미술 실기나 프로그램 사용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작업 퀄리티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지만, 작품에 담긴 텍스트적 깊이성이 늘 부족했었다. 때문에 항상 내 작업은 학생들에게는 감탄을, 교수들에게는 아쉬움을 불러왔다.
불안한 시간들이 지속되더니, 2월 중간평가에서 결국 나는 과락을 맞았다. 성적표에는 '작업의 퀄리티는 좋으나 교수들과의 소통이 더 필요함'이라는 코멘트가 적혀있었다. 예술을 하러 프랑스에 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학교에 입학한 이상 좋은 평가를 받고 싶었고, 그들의 방식을 배우며 성장하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부분이 잘못된 걸까, 깊게 고민하고 학교 친구들과도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조언을 구했다. 전혀 아트적으로 사고해 본 적 없던 나는 그들의 기준과 방식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을 고민한 끝에 나는 한 가지 해답을 발견했다.
내가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상업 영화가 갖고 있는 집단적인 체험 전달력에 있었다. 즉,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고 가정했을 때, 공간에 있는 모두가 동시에 같은 장면을 보고 환호하거나 슬픔을 느끼는, 동일한 감정이 전염처럼 퍼지는 그 마법 같은 매력에 빠졌었던 것이다.
반면에 보자르를 다니며 내가 깨달은 예술은, 모두가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 때 더욱 가치가 있는 것임을 알았다. 즉 각자가 작품을 보며 각자의 관점에서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열린 감상의 행위가 발생할 때, 예술로서의 가치가 더욱 빛나게 되는 것이다.
그 포인트를 이해하게 되니, 지금까지 난해하고 의미가 불투명한 예술작품들의 근본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작업의 메시지가 명확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예를 들어 디즈니의 겨울왕국을 보고 우리는 예술 영화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겨울왕국을 보면서 우리는 더 이상 생각할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너무나 명확하게 선악이 나눠져 있고,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해피엔딩에 우리는 만족하며 해석을 멈추게 된다. 상업영화이다. 하지만 기생충 같은 영화를 예로 들면, (기생충도 상업영화에 가깝지만 예술성도 강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게 예로 들었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해석을 시작하게 된다. 결말은 어떤 의미일까? 저 장면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지? 감독의 의도는 뭘까? 모두가 생각을 하게 만들고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을 하는 순간 그건 예술영화가 된다.
과락을 경험한 후, 긴 시간 고민 끝에 내가 개인적으로 결론 지은 예술의 정의는 이렇다.
'작가가 충분히 성찰하고 숙고하여 작품으로 질문을 던짐으로써 관객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
발렁스 보자르에서 내가 배운 예술은, 생각하게 만드는 모든 것이었다. 예술은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질문을 던지고 우리 스스로 고뇌하게 만든다. 때문에 오늘날의 현대 예술은 모두 난해하고 불친절하며, 스스로 감춰져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은 정답 없이 너무나도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인데, 그 사회를 반영한 예술이 명확하게 모두가 같은 답을 내릴 정도로 다 보여버리면 그건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거다.
'예술 알못'이었던 나에게, 이 명쾌한 진실을 6개월 만에 깨닫게 해 준 건 프랑스 예술학교의 영향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긴 시간 고민 끝에 스스로 얻어낸 쾌거였을까? 아무튼 나는 그렇게 현대 예술의 세계를 이해해 가며, 중간평가의 실패를 발판 삼고 만회하기 위해 다음 학기에 모든 것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