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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립 Jan 19. 2023

08. 프랑스 보자르 입시 여행

2012년 4월, 리옹


'올해 학교를 들어가지 못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4월이 되면서, 사실상 4개월 시한부 인생이나 다름없었던 나의 프랑스 생활은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국과는 달리 학교 원서접수에 횟수 제한이 없어 물량으로 승부를 볼 수 있다는 점이었었다. 1월부터 프랑스 사이트를 뒤져 내가 지원할 수 있는 조건의 보자르 학교 리스트를 엑셀로 만들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대학평준화가 상당히 잘 되어있었고, 남들에 비해 입시 준비기간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나는 지역에 상관없이 아무 학교만 들어갈 수만 있으면 그저 감지덕지였다. 그동안 매일 밤 잠을 줄여가며 준비한 포트폴리오와 지원서류, 동기서를 첨부한 원서 봉투를 전국에 닥치는 대로 뿌렸다. 그리고 몇 주 뒤, 단 3군데 학교에서 편지가 왔다.

뚤루즈 Toulouse와 몽펠리에 Montpellier, 그리고 발렁스 Valence 보자르였다.


이제는 각각 다른 지역에 있는 이 세 도시를 돌며 입학시험과 면접을 치르러 순방을 다녀야 할 차례였다. 프랑스는 이렇듯 입시철이 되면 전국에 있는 학생들이 포트폴리오를 들고 입시 여행을 다닌다.


첫 번째 시험지는 뚤루즈였다. 처음으로 기차를 예약했고, 한인사이트를 통해 한국분이 하시는 하숙집을 구했다. 굉장히 넓은 집에서 혼자 사시는, 나이가 조금 있으신 여자분이셨는데, 다음날 있을 첫 시험을 위해 많은 것을 챙겨주셨다. 4개월 만에 처음으로 김치찌개도 먹어봤다.

다음날 아침 일찍 뚤루즈 보자르로 가보니 전부 화판이나 화통을 든 입시생들이 입구에 몰려있었다. 시간이 되자 모두 학교 강당에 모였고, 드디어 나의 첫 프랑스 입시 시험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보자르 입학시험은 대부분 필기/실기 시험과 영어시험, 그리고 면접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필기/실기 시험은 굉장히 전방위적인 예술 개념에 대한 능력을 테스트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입시 패턴이 존재하는 한국과는 달리 시험을 준비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까다롭다. 가령 뚤루즈에서 봤던 시험은 이런 식이었다.


(톰과 제리의 제리 이미지와 거대한 쥐 설치 미술을 보여주고) 두 작품을 비교/분석하는 글을 써라.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를 떠올리고 그 전시의 작품과 내가 대화하는 과정을 그려라. 


문제 자체도 굉장히 시적으로 적혀있었기 때문에 읽고 해석하는데만 시간이 꽤 걸렸다. 너무나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질문에, 뭐라고 적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허접한 글들을 휘갈겼던 것 같다.

그리곤 가장 중요한 면접시험. 사실상 면접에서 대부분이 결정된다고 봐야 하는데, 아직 즉홍적으로 불어로 답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서 예상 질문,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예상 답변을 10장이 넘는 A4용지에 가득 채워 적어 달달 외워갔다. 어느 질문을 하더라도 외워간 답변 그대로 돌려 말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외워간 것들이 무색하게, 면접을 대차게 말아먹고 비참한 기분으로 리옹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서툴렀던, 엉망진창인 나의 첫 프랑스 보자르 입학시험이었다. (그 와중에 뚤루즈 관광은 잘하고 왔다)


두 번째로 시험을 봤던 몽펠리에에서는 A부터 Z까지 알파벳 목록을 쭉 적은 뒤, 각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아는 작가 이름과 작품 이름을 전부 적으라는 기상천외한 시험이 나왔다. 말 그대로 평소 예술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단번에 알아보는 시험이었다. 그동안 대중문화에만 익숙했던 나는 대부분의 알파벳 목록이 빈 곳 투성이었다. 시험을 치르는 동안 문득 한국에서 유학원을 다녔었더라면, 이런 시험에 대한 준비과정도 거칠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던 두 개의 시험을 마치고, 그동안의 과정을 복기해 봤다. 고민 끝에 내린 답은, 프랑스 보자르의 입학시험은 아무리 생각해도 평소에 책을 많이 읽고 여러 작품을 자주 접하는 것 외에는 준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과, 무엇보다 어학이 안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 주 정도 남은 발렁스 보자르 시험을 위해 두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강했다. 당장 여기저기 전시를 돌아다닐 시간은 없으니, 인터넷을 뒤져 철학 또는 현대미학에 대한 내용들을 주워듣고, 지난 면접들을 토대로 예상 질문/답변을 더 늘려갔다. 이제는 단 한 기회밖에 남지 않았다.


프랑스의 노동절인 5월 1일, 마지막 시험지인 발렁스로 떠났다. 교통편 파업 중이라 제니퍼의 차를 얻어 타고 겨우 기차역에 도착했다. 기차에 오르기 직전, 제니퍼는 노동절 전통이라며 방울꽃을 한 묶음 건네주었다.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발렁스에 도착한 후에는 운 좋게 구한 한인 부부의 하숙집에서, 나처럼 보자르 시험을 치르러 온 두 명의 한국인 입시생과 같이 지냈다. 늘 혼자 기숙사에서 입시만 준비하다가 다 같이 복작복작 한 집에서 밥을 먹으며 TV를 시청하니 한국에 온 느낌이 들어 오랜만에 정겨웠다.


다음날 시험이 시작되었다. 필기시험은 역시 두 개의 예술 영상 작품을 틀어준 뒤 느낀 바를 적어내는 시험이었다. 대체 뭔 내용인지 감도 안 잡힐 만큼 난해한 영상들이었지만, 그동안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내용들을 필사적으로 소환해 글을 적어갔고, 다음에 이어진 영어시험은 중학교 문법시험 수준으로,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이튿날 면접시험이 이어졌다. 지원자들이 많은 관계로 미리 시간표가 나왔고, 해당 시간대에만 학교에 가서 면접을 보고 오면 되는 방식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고 교수들은 왜 프랑스에 왔는지,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지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인 작업 질문으로 들어갔다. 포트폴리오 작업에 대한 질문들은 상당히 디테일해서, 왜 이런 기법을 썼는지, 왜 이런 색을 썼는지 하나하나 의미들을 세세하게 물어봤다. 


보자르 용 포트폴리오를 준비할 때는 퀄리티 있게 완성된 작품 외에도, 평소 본인의 생각이나 접근법을 보여줄 수 있는 일기, 스케치, 낙서 등을 가져가는 것도 꽤 도움이 된다. 나는 군대 있었을 때 썼던 일기를 가져갔고, 교수들은 일기 중간중간 그려 넣은 스케치들을 흥미롭게 봐주며 내 군생활에 대해 묻기도 하였다. 


나름 열심히 준비해 간 작업들이었지만, 계속해서 쏟아지는 질문들에 그 의미들을 깊이 있게 설명하기에는 내 불어 실력은 금방 밑천을 드러냈다. 자꾸만 버벅거리는 내 말투에 교수들의 표정은 어두워졌고, 뭔가 마무리가 되어가는 분위기였다.

이제 그만 나가봐도 좋다는 한 교수의 말에, 이대로 나가면 다 끝나버린다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해도 괜찮을까요?"

"그러세요."

그때는 정말 이게 마지막일 거라 생각했다.


"제가 불어가 부족하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올해 1월에 프랑스에 처음 왔고 불어를 배운 지 이제 막 5개월이 되었어요. 그래도 이렇게 교수님들 앞에서 면접을 보고 있습니다. (학기가 시작되는) 9월이 되면 제 불어는 지금보다 훨씬 더 향상되어 있을 겁니다. 약속드립니다."


그렇게 모든 걸 불태우고 면접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느낌이 팍 왔다.

아, 망했구나.

질문을 이해 못 하던 순간, 대답을 어버버 하던 순간 등 부끄러운 기억들이 싹 스쳐가면서 너무도 허탈한 마음이 밀려왔다. 나에게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언어를 더 완벽하게 말할 수만 있었다면...

그리고 착잡한 마음으로 리옹행 기차에 올라탔다.


늦은 밤, 기숙사에 들어와 노트북을 켰을때는, 뚤루즈 보자르 불합격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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