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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립 Jan 17. 2023

06. 꿈꾸던 해외생활, 시작

2012년 1월, 리옹


그렇게 지옥 같던 리옹 입성 신고식을 호되게 치르고, 

약 3평 남짓한 기숙사 방에서 인생에서 가장 소외된 새해를 보냈다. 내가 머물던 기숙사는 4층 짜리 건물로, 층마다 길고 좁은 복도가 쭉 이어져있고 양 옆으로 몇십 개의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주방과 샤워실은 모두 공용, 기숙사라기엔 병동 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 여러 개의 동 건물들은 주변의 숲과 함께 제법 큰 단지를 이뤘다. 힘겹게 끌고 왔던 이민 가방 안의 짐들을 모두 꺼내 정리하니, 그래도 제법 방 같은 느낌은 들었다.


1월 2일, 어학원 첫날이 되었다. 첫째 날에는 앞으로 수업을 들을 반배정용 불어 테스트를 치른 뒤, 그곳에서 만나게 된 한국인 유학생 몇 명과 동행하여 리옹 도시 구경을 나섰다.

리옹은 프랑스 중남부에 있는 도시로, 프랑스에서 3번째로 규모가 큰 도시이다.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고, 다른 프랑스 도시들에 비해 깔끔한 신도시 이미지가 있어 여러모로 우리나라의 대전이 떠오르는 곳이다. 도시 자체에 뭐가 별로 없어 여행을 오기에는 상당히 노잼도시라는 점도 비슷하다.


쏜(Saône) 강과 론(Rhône) 강이 넓게 가로지르는, 건물이 전부 빨간 지붕으로 통일되어 있는 이 도시가 나는 마음에 들었다. 첫날과는 달리 가벼운 몸으로, 밤이 아닌 낮에 기숙사 주변과 리옹 시내를 돌아보니 이제야 프랑스에 와있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 와본 서양, 유럽 국가.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도시의 모든 것이 신기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설레는 기분으로 도시의 이곳저곳을 더 관광하고 즐겨보고 싶었지만 사실상 나에게 그런 여유는 없었다. 아직 나는 유학생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어학연수생에 불과했고, 학교를 들어가지 않는 이상 모든 건 의미가 없었다. 벌써 1월, 원서접수가 시작되는 2-3월까지 입시용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하고, 어학도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올려놓아야 했다. 


하지만 나는 자취생활이라는 것이, 이렇게 잡일에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인 줄 전혀 몰랐다.

한국에서는 부모님 집에 있으면서 빨래, 식사, 장보기 등 대부분의 집안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별다른 방해 없이 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당연했던 것들이 프랑스에 온 뒤에는 모두 나 혼자서 떠안아야 할 일들이었다. 심지어 2012년의 나는 그렇게 살림에 익숙한 수준이 아니었고, 유학 오기 전에 겨우 엄마한테 밥솥 사용법과 제육볶음 레시피 하나를 배웠을 정도였다.


내가 어느 정도로 살림에 서툴렀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리옹에 도착하고 1-2주 뒤, 나는 빨래를 하러 기숙사 공용 빨래방으로 옷 바구니를 들고 갔다. 빨래방에는 두 가지의 기계가 있었고, 불어가 아직 미숙했던 나는 그 둘의 차이점을 몰랐다. 동전을 넣으려고 가격표를 보니 첫 번째 기계는 3유로인 반면에 두 번째 기계는 1유로 밖에 안 했다. '조금 더 성능이 떨어지는 구식모델인가?'라고 생각한 나는 당연히 돈을 더 절약하려 두 번째 기계에 옷을 돌렸다. 가루 세제를 넣고 시작버튼을 누른 뒤 태연하게 산책을 하러 나갔다. 잠시 후 다시 돌아와 옷을 확인해 보니 따뜻하게 말라있었고, '생각보다 성능 좋은데'라고 생각하며 나는 옷들을 챙겨 왔다. 당연히도 그 두 번째 기계는 건조기였고, 나는 한 달 동안 원인을 모른 채 가루비누들이 그대로 묻어있을 옷들을 입으며 가려움증으로 꽤나 고생했다.

 

이렇듯 생각지 못했던 잡일의 부담이 추가되자 자연스럽게 어학과 포트폴리오 준비 시간은 적어졌고, 방법은 잠을 줄이는 일뿐이었다. 대부분의 어학원 수업은 오전에 몰려있었고, 나는 한국에서 학원을 다닐 때의 습관처럼 오전에 수업을 듣고, 낮에는 도서관이나 집에서 부족한 부분을 공부하고, 밤에는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포트폴리오를 작업했다. 늘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에 시달렸던 날들이었지만 꿈꾸던 해외생활을 시작하며 온전히 내 목표에 집중할 수 있던 그때가 참 좋았다. 늦은 시간 졸음이 찾아올 때면 밖으로 나가 밤산책을 하며 리옹 밤거리의 풍경에 젖어들기도 했다. 아름다웠던 주황빛의 리옹 밤 풍경은 불안한 내 마음을 자주 위로해주곤 했다.


자신 있게 생각했던 거와는 달리 프랑스어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어려웠고 복잡했다. 언어는 문화를 담은 거울이라고, 한국인들에게 문화적으로 꽤 익숙한 영어와 중국과는 달리 낯선 유럽 문화를 담고 있는 프랑스어는, 그 고유의 방식에 익숙해지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보다 높은 어학 난이도에 나는 더욱더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중국에서 언어를 배울 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비장의 필살기를 써야 했다.

프랑스인 이성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다.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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