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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립 Jan 17. 2023

07. 어학의 고수

2012년 2월, 리옹


중국에 있었을 때, 나는 중국인 친구들이 정말 많았다.

지인을 통해 지내다 보니 소개받는 사람들도 많았고, 술집과 고깃집에서 일하면서 친해진 직원 동료들, 또는 손님으로 만나 알게 된 친구들까지. 앞서 말했듯 그 당시 중국에는 한류가 막 싹을 틔우던 시절이었고, 한국에서 온 멀쩡하게 생긴 나에게 사람들은 쉽게 관심을 갖고 다가와주었다.


대부분의 학습이 그렇지만 언어는 특히 익숙함의 학문이다. 이론으로 배우는 것보다는 그 안에 섞여야 하고, 부딪혀가며 익숙해져야 실로 늘게 되는 것이다. 중국어를 못했어도 나는 중국인 직원들 사이에 섞여서 같이 일을 했고, 밤이면 선술집에서 회식을 하며 웃고 떠들었다. 2개월 만에 중국어를 유창하게 말하게 된 데에는 그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다.


그에 비해 프랑스에 와서는 어학원의 현지 선생님들을 제외하고 단 한 명의 프랑스인 친구도 사귀지 못했다. 만날 껀덕지도 없었거니와, 그 당시 이곳에서 동양인 남자에 대한 관심도는 중국에서의 경험과 비교했을 때 거의 제로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 처참했던 관심도를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끌어올려준 BTS에 감사한다.) 생각보다 높은 프랑스어의 장벽을 느끼자 나는 중국에 있었을 때 썼던 카드를 다시 꺼내야만 했다.

그래, 어떻게든 프랑스 친구부터 만들어보자. 


당시에는 틴더도, 오늘날 언어교환에서 많이 사용하는 헬로우톡 어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기왕이면 한국 문화에 관심 있는 프랑스인을 만나고 싶었고, 그래도 기왕이면 이성친구를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코리안 큐피드'라는 사이트를 발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시대를 앞서간 사이트였다. 대충 둘러보니 한국인을 만나고 싶어 하는 선견지명 깊은 프랑스인들의 리스트가 꽤 있었다. 

이름에서도 보이다시피 목적은 조금 다른 쪽을 지향하는 사이트 같았지만, 그래도 운이 좋으면 친구를 사귈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고 프로필을 적어 올렸다. 며칠 뒤 한 프랑스 여자와 매칭되었고, 대화를 해보려고 챗을 키니 웬걸, 채팅을 하려면 유료 가입을 해야 했다. 

돈이 없으면 친구도 못 만드는구나. 좌절하고 있는데, 그 친구에게서 먼저 메시지가 왔다. 다행히 그 친구는 유료 구독을 하고 있는 상태였고, 몇 번 대화를 주고받은 끝에 우리는 오프라인에서 만나기로 했다. 단둘이 만나기에는 서로 부담스러웠었는지, 한 명씩 동행친구를 데리고 넷이서 보기로 했다.


그때 내 인생 첫 프랑스 친구인 제니퍼와 멜리사를 처음 만났다. 그 둘은 걱정했던 거와는 달리 순수하게 한국인 친구를 만나고 싶었던 착하디 착한 친구들이었고, 리옹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류가 유행하기도 전에 어떻게 한국 문화를 접한 건지 신기하지만 나에게는 그 둘이 동아줄 같았다. 안 되는 불어와,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었고, 앞으로 내 리옹 생활에서 정말 지대한 도움들을 받게 된다.


어학원 첫째 날 불어 시험 이후 내게 배정된 반은 전체 6개 반 중 3번째 레벨,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여전히 불어를 말하고 듣는데 어려움은 많았지만 그동안 열심히 기본 문법을 팠던 게 집필시험에서 빛을 발휘한 듯했다. 문제는 내 문법실력과, 말하기/듣기 실력은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초급자치고 꽤 레벨이 있는 반에서 나는 상당히 고전했다. 주변에는 온통 남미, 유럽 문화권에서 온 외국인들이었고, 이들의 문법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신기할 정도로 불어를 잘 알아듣고 술술 말했다.

수업 내내 한마디도 이해를 못 하니 그 기분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좌절스러웠다. 하루는 전혀 따라갈 수 없는 수업에 현타가 와서 충동적으로 제니퍼와 멜리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 정말 죽고 싶어."

무슨 일이냐고 자초지종을 묻는 그들에게 나는 불어가 너무 어려워서 절망스럽다고 토로했다. 잠잠히 내 하소연을 들어주더니, 이런 답장이 왔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랑 매일 만나자. 우리가 도와줄게."


그때부터 수업이 끝나면 Terreaux 광장에 있는 그들의 단골 바에서 만나 매일같이 시간을 보냈다. 가끔은 멜리사의 집에서 다 같이 간식을 먹으며 프랑스어 듣기 CD를 같이 반복해서 듣곤 했다. 프랑스어로 글을 써야 하는 일이 있을 때면 정말 한 단어 한 단어 정성스레 교정을 해주기도 했다. 왜 이 표현이 어색한 건지, 같이 쓰면 좋을 동의어까지 리스트를 만들어줄 정도였다.


그렇게 하루에 3-4시간씩 그들과 시간을 같이 보냈다. 사실 쉽지만은 않은 시간이었다. 프랑스인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대화할 때 타인을 크게 배려하지 않는 편이었고, 어느 정도 안부 대화를 나누다가 자기들끼리 내가 모르는 주제에 대해 몇 시간을 떠들기도 하였다. 물론 문화의 차이고, 온전히 언어가 부족한 나의 문제지만 오랜 시간 동안 대화에 참여도 못하고 앉아있다 보면 회의감도 많이 들곤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떠들다가 저녁이 되면, 그들은 바에서 피자를 시켜 먹곤 했다. 외식은 엄두도 못 냈던 나는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라도 이 자리를 빠져나와야 했다. 이따가 저녁 약속이 있다라든지, 배가 안 고파서 너희들끼리 먹으라든지. 한 조각씩 나눠주려는 제안에도 이렇게 얻어먹으면 끝이 없을 것 같아 한사코 거절했다. 그렇게 그들의 저녁식사가 끝나면 난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굶주린 배를 움켜쥐며 라면을 끓이곤 했다.


몇 시간씩 대화에 참여도 못하고, 남들 먹는 피자만 구경하다가 밤이 되어 집으로 귀가하다 보면, 그 길이 참 외롭고도 비참했다. 나도 한국에 있을 때는 사람들 앞에서 외향적이고, 피자 좋아하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씁쓸했다. 그런데 그렇게 몇 달을 반복하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날도 제니퍼, 멜리사를 만나 시간을 보내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어느새 내가 혼잣말을 불어로 하고 있는 걸 깨달았다. '얼른 씻고 밥 해 먹어야지', '화장실 좀 갔다 와야겠다' 등의 소소한 얘기들을 혼자 불어로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대화에 별로 참여도 못하고 있던 나였지만, 제니퍼와 멜리사를 만나 계속해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도 모르게 그들이 했던 어조, 표현, 제스처들이 내 몸에 배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언어라는 건 소스에 내 뇌를 절이듯, 오랜 시간 푹 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왜 한국에서 배우는 어학이 큰 효과가 없는지도 깨달았다. 아무리 학원에서 배워도 일상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이상, 내 뇌가 다른 언어 소스에 절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어학원 학생들이 쉽게 얻을 수 없는, 현지 프랑스 친구인 제니퍼와 멜리사를 등 뒤에 업은 나는 어느 순간부터 어학원에서 날라다니기 시작했다. 몇 달 뒤에는 학원에서 가장 높은 레벨인 6반에 들어가고, 학생들 사이에서 무섭기로 꽤 악명 높았던 알린이라는 보스급 선생님에게 반에서 유일하게 'Bravo' 소리까지 들었다. 아직 부족한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듣고 말하기가 어느 정도 뚫리기 시작하니 살 것 같았다. 그렇게 어학원 선생님과, 제니퍼, 멜리사의 도움으로 보자르 입학 원서를 접수하고 어느새 3월, 입시 시험 시즌이 다가왔다.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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