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서울
프랑스의 입시제도를 대략 설명하자면 이렇다.
프랑스에는 보자르, 정확히는 에꼴 데 보자르 (École des beaux-arts)라고 불리는 국립 예술학교들이 있는데 학비도 저렴하고 순수미술, 디자인 등 종합적인 예술을 배울 수 있어 유학생들이 가장 흔히 준비하는 학교 중 하나이다. 내가 가고 싶었던 애니메이션 학교들은 대부분 사립들이고 (학비가 비싸다) 굉장히 높은 어학 수준과 실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우선 나 같은 초짜들은 보자르에 입학한 뒤, 경험을 쌓고, 이후 편입을 노리는 것이 낫다. 문제는 대부분의 보자르들이 원서접수를 1월에서 3월 사이에 받고, 입학시험을 4월에서 5월 동안 치른 후 9월에 학기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내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아간 시점이 10월. 포트폴리오를 포함한 모든 원서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시점이 3개월 뒤고, 면접 등 입학시험을 치르기까지 고작 6개월 정도 남은 것이다.
평균적으로 최소 1년에서 많게는 2년까지 어학과 입시를 준비하는데, 보자르 입학 용 포트폴리오도 없거니와, 불어도 한마디 못하는 나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정이라는 게 유학원 측 답변이었다.
절망스러웠다. 이제 겨우 해답을 찾은 듯했는데 타이밍을 놓쳐 다 허사가 되다니... 국립학교 학비에 비해 프랑스의 어학원은 비상식적으로 비쌌고, 나에게는 여유 있게 어학을 배우면서 내후년까지 준비할 재정적인 상황도,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이대로 그냥 포기할 순 없었다. 나에게는 정말 마지막처럼 느껴지는 유일한 기회였고,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선택지라면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건 나한테 달린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부술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지던 '돈'이라는 문제가 해결된 상황이라면 해볼 만한 싸움이지 않을까?
'불가능한 일정'이라는 건 안정적인 합격율을 생각해야 하는 입시 유학원의 입장인 거고, 이번에는 그냥 유학수속만 밟아주는 곳을 찾아 상담을 문의했다. 역시 내년 입학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이었지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수속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입시 유학원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수속만 준비해 주는 기관이라 내 입장에서는 모든 면에서 더 이득이었다. 수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프랑스 대사관과 공증기관, 번역기관을 들락날락거리며 필요서류들을 준비해 갔고, 여권도 새로 만들었다. 예산이 가장 중요했기에 어학을 할 도시와 그 도시에서 가장 저렴한 어학원, 기숙사가 정해졌고, 나는 12월 31일, 리옹(Lyon)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20년 동안 해외라곤 가본 적도 없는 내가 불과 5개월 사이에 3개국을 왔다 갔다 하게 된 상황이 신기하면서도 웃겼다.
이제 남은 건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맞다, 놀랍게도 아직까지 부모님을 설득하지 않았었다.
정확히는 유학을 반대하는 아빠를 설득해야 했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본인의 일을 돕기를 바랐던 아빠는 프랑스 유학에 대해 강렬히 반대했었다.
결론은 유학비를 지원해주지 않겠다는 얘기로 끝이 났는데, 그럼에도 나는 한 해에 50만 원 정도 한다는 파격적인 프랑스 학비에 눈이 멀어 그런 것쯤은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생활비는 어떻게 하냐고? 그런 것까지 디테일하게 생각할 나이가 아니었나 보다. (아니면 P라서 그럴지도) 당시 내 머릿속은 온통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뿐이었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든, 밥을 굶든, 예전 재수생활 때에도 집을 나와 고시원에서 혼자 자취해 본 경험이 있었기에 아껴 사는 데에는 도가 텄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떠나기 전까지 최대한의 생활비를 모으고 싶었기에 남은 두 달 동안 일할 영어 강사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오전에는 신촌의 프랑스어 학원에서 기초 문법을 배웠고, 수업이 끝난 뒤 홍대에 있는 마포도서관에서 배운 것들을 틈틈이 복습한 다음, 저녁에는 강남 쪽의 영어학원으로 이동해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렇게 하루종일 밖에서 지내다 보니 매일매일 드는 식비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출국 전까지 한 푼이라도 더 아끼고 싶었다. 엄마에게 부탁드렸더니 매일 주먹밥을 싸주셔서 가지고 다녔다. 문제는 막상 먹을만한 장소가 없다는 것이었다. 영어학원 수업이 저녁 7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미리 저녁을 해결해야 했는데, 이동하며 지하철 안에서 주먹밥을 들고 먹기에는 도저히 엄두가 안 났고, 역에서 내리면 학원은 바로 코 앞이었다.
학원에서 먹을 수 있는 곳도 마땅치 않아 고민하다가 나름 방법을 찾았다. 홍대에서 2호선을 타고 가다가 강남역에 내려 긴 강남대로를 따라 쭉 걸으면서 주먹밥을 먹는다. 신논현역을 터닝포인트로 돌아 다시 강남역으로 돌아오면 한 끼 식사를 딱 마칠 수 있었다. 유일한 문제는 추위였다. 한국의 11, 12월은 정말 미친 듯이 추웠고 특히 강남대로는 유난히 강풍이 심한 대로변이었다. 그렇게 매일 벌벌 떨며 2개월 동안 노상 주먹밥 식사를 버텼다.
출국까지 일주일정도 남겨뒀을 때, 유학을 반대하던 아빠는 갑자기 나를 남대문 시장으로 데리고 가 이민 가방, 전기밥솥, 선글라스, 신발, 내복 등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사주었다. 노트북까지 사준다는 말에 나는 안 사줄 것 같아서 이미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샀다고 대답했고, 서로 당황한 듯이 쳐다봤다.
매서운 겨울 날씨가 이어지며 어느새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출국날이 다가왔고 우리 가족은 과연 유학 초짜답게 양은냄비에, 밥솥에, 쌀, 라면, 고추장까지 바리바리 싸며 이민 가방만 두 개가 나왔다. 공항으로 가는 길, 불과 몇 달 전 중국으로 출국을 했던 터라 크게 실감은 나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아빠는 학교 떨어지면 그냥 바로 돌아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워낙 서로 표현을 잘하지 않는 성격인 터라 우리는 쿨하게 사진 한 방을 박고 담담히 인사를 나눴고 나는 손을 흔드는 부모님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출국 게이트로 들어갔다. 크게 실감도 안 났고 딱히 두려운 것도 없었는데 출국장에 들어서자마자 정말 거짓말처럼 갑자기 울음이 막 쏟아졌다.
'이제는 정말 혼자구나, 앞으로 모든 것을 혼자 다 헤쳐나가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확 덮쳤던 것 같다.
그렇게 12월 31일, 나는 프랑스 리옹으로 떠났다.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