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베이징
그래서 해외로 나갈 방법을 찾았냐고?
전혀, 전역한 후에 내 인생은 마치 어느 일본영화에서 실패한 주인공의 꿈 잃은 인생마냥 평범하고 별거 없었다. 낮에는 혼자 집에 틀어박혀 단편 애니메이션을 구상하고, 저녁에는 영어학원에서 강사로 알바를 했다.
그래도 어렸을 때 외국어를 좋아했었고, 미국 유학을 준비한답시고 군대에서 토플을 공부했던 게 쓸 데는 있었던 거지. 다음 해 복학을 준비하기 전까지 그런 일상이 반복되었다. 알바를 마치고,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 세상 이야기를 떠들어대며, 나름 평범하지만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만 생산적이게,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쁜 일과로 스스로를 속여가며 꿈틀거리던 유학의 꿈은 서서히 꺼져 들어갔다.
4월에 전역을 한 터라 이듬해 복학까지는 꽤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고, 어느 날 아빠는 뜬금없이 중국에 가라고 했다. 중국에 아빠와 파트너로 일하는 분들이 몇 계시는데 가서 경험도 쌓고 일도 도와드리라는 얘기였다.
어떻게 보면 내 인생 첫 해외로 나가게 되는 기회였지만 솔직히 썩 내키지는 않았다. 나는 영어권 나라로 가서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며 그들의 선진 예술 문화를 경험해보고 싶었는데, 그때 당시 내 머릿속 중국은 그런 이미지와는 너무 멀었다.
그리고 2011년 7월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비행기를 타본 적이 너무 없어 입/출국 수속도 쩔쩔매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중국은 이제 막 한류라는 게 처음 퍼지기 시작되면서 한국 드라마나 음악들이 유입되고, 조금씩 문화적으로 성장하려는 분위기가 막 엿보이던 시기였다. K팝이라는 단어가 아직 없을 때였고, 가수 황치열이 중국에서 신드롬을 일으키기 몇 년 전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빠의 파트너 분들은 베이징의 우다커우라는 대학가에서 한국식 삼겹살집, 술집으로 대박을 터뜨렸고 난 그곳에서 일을 도와드리며 아침에는 어학원에서 중국어를 공부했다.
'중국어는 배워서 뭐 하나..' 라며 시작했지만, 그 나라에 살며 현지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재미있었고, 이상하리만치 나는 어학에 소질이 있었다. 영어를 어느 정도 쓸 줄 아는 나에게 있어 영어와 비슷한 문법체계를 가진 중국어는 마치 조립을 하듯이 단어를 끼워 맞추면 문장이 되는 레고 같은 언어였고, 2개월 만에 중국인들과 술을 마시며 문화, 사회에 대해 토론을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군대를 제외하고) 집을 나와 타지에 살며 맛보는 이국적인 자유와 해방감은 상상 이상으로 설레는 일이었고, 대학가라는 동네 특성상, 정말 많은 국적의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우다커우는 한국으로 치면 홍대, 신촌, 이대 같은 곳이다) 이제 막 한류가 싹트기 시작하는 베이징에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한국인인 내게 큰 관심을 보였고, 중국에 살면서 이 흐름을 자연스럽게 느꼈을 다른 외국인들도 마찬가지로 내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와주었다.
중국, 러시아, 미국, 카자흐스탄...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만나고 소통하면서 나는 다시 한번 해외에 나가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갔고, 전역 후 꾸역꾸역 살아가느라 잊혀졌던 유학의 꿈이 다시 타올랐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고질적인 문제점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꿈보다 중요한 돈, 그게 해결되지 않는 한 상황은 달라질 게 없었다. 달콤한 휴가 같았던 3개월이 순식간에 지나고 다시 현실의 무게가 슬슬 다가오자 나는 또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야 할까? 더 큰 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이 욕망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