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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뇌가 한다 02

인출과 기억의 과학

빠른 것의 딜레마

이와 같이 어떤 것과 다른 것을 연결시켜서 외우는 종류의 학습을 특별히 ‘연합학습(associative learning)’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시험에 꼭 필요한 ‘암기 능력’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죠. 이 연합학습은 우리가 종종 듣는 해마(hippocampus)라는 영역에서 일어납니다. 해마에 존재하는 뉴런들은 매우 빠르게 연결이 완성됩니다. 거의 보자마자 연결이 생성되는 수준이죠(one-shot learning). 예를 들어, 시험을 위해 ‘중세’와 ‘노틀담’을 연합해 외운 것도 해마에서 둘 사이의 연결이 매우 빠르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해마는 마치 사진을 찍듯이 빠르게 기억을 만들어냅니다.

상식적으로 이런 종류의 학습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사가 그렇듯 빠른 학습에도 부작용이 존재합니다. 에를 들어, 해마에서 ‘중세’와 ‘노틀담’이 빠르게 연결되었다고 생각해보죠. 그런데 이번엔 ‘중세’와 ‘봉건제’를 외워야 합니다.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중세’와 ‘노틀담’에 해당하는 뉴런 사이의 연결은 약화되고 ‘중세’와 ‘봉건제’ 사이의 연결은 강화됩니다. 이게 의미하는 것이 짐작이 되시나요? 빠른 학습 때문에(!) 앞서 형성된 기억이 이후의 학습에 의해 사라져버린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해마는 정보를 빠르게 기록할 수 있지만, 그만큼 망각도 빠르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학습 시스템이라는 것이죠! 우리들이 시험 전날 벼락치기로 공부한 내용을 다음 날에 모두 망각해 버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빠른 암기는 해마에서 일어나지만, 해마의 특성 상 그 빠르게 만들어낸 기억은 금방 없어져 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시험을 위해 빠르게 암기를 해야 하는 상황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안정적인 지식을 유지할 필요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펭귄을 처음 봤을 때, 우리가 애초에 갖고 있던 “새들은 난다.”라는 지식이 없어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 뇌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까요? 뇌가 찾아낸 해결책은 시간을 들여 해마에서 임시적으로 저장한 내용을 ‘신피질(neocortex)이라고 불리는 장기저장소에 옮겨 안정적인 형태로 저장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 종류의 학습 시스템을 동시에 유지함으로써 뇌는 유연한 학습, 안정적인 학습 모두를 구현할 수 있게 됩니다.

기억공고화.png

시험을 잘 보기 위한 방법

이제 뇌의 작동 원리를 살펴보았으니, 이를 바탕으로 실질적으로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전략을 정리해보겠습니다.


1. 여러 과목을 섞어서 공부하자.

몇일 후에 있을 시험을 잘 보기 위해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과목을 각각 5회독하기로 정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공부해야 해마의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을까요? 위에서 이야기한 해마의 특성을 살펴보면 힌트가 나옵니다. 해마에 저장되는 기억들은 빠르게 형성되는 만큼, 서로를 방해합니다. 비슷한 기억들끼리 경쟁하고, 나중에 형성된 기억이 이전의 기억을 덮어쓰는 일이 생겨나 금방 기억이 망각됩니다.

이러한 기억의 방해 효과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여러 과목을 섞어서 공부하는 것이 매우 유리합니다. 국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섯 번 연달아 공부한 후, 수학으로 넘어가는 식보다는 국어 한 목차 다음, 수학 한 목차, 영어 한 목차 이런 식으로 최대한 섞어서 공부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비슷한 내용들끼리 방해하고 경쟁하는 효과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죠.


2. 벼락치기 후엔 꼭 복습을 하자.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안정적인 ‘역량’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 안정적인 기억을 만드는 데에는 오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위해 무엇인가를 빠르게 외워야 하는 게 현실이고, 이럴 땐 벼락치기로 해마에 공부한 내용을 구겨 넣어야 합니다. 시험을 본 후 다음날 바로 잊어 버린다 해도 말이죠.

이러한 점에서 벼락치기는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비효율적이지만 현실적으로 필요한 공부법이긴 합니다. 그런데 이 비효율성을 극복할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시험을 보고 난후 잠깐이라도 벼락치기로 공부한 내용을 복습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기억의 망각을 막기 위해선 긴 시간에 걸쳐 해마의 임시 기억을 신피질의 장기저장소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전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반복된 ‘복습’입니다. 복습을 할 때마다 장기저장소로의 전환 속도가 가속화되기 때문입니다.

시험 끝나고 복습하는 게 끔찍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희소식이 있습니다. 이미 공부를 통해 일단 입력된 정보를 장기저장소에 전환하기 위해서 필요한 복습의 정도는 매우 가벼워도 된다는 점입니다. 가볍게 전체를 훑는 정도로도 전환 과정에 스위치가 켜집니다. 그러니 시험을 끝내고 하루 정도는 코인노래방도 가고 좀 쉬고, 그 다음엔 공부한 내용을 가볍게라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험 기간에 공부한 내용을 까먹지 않고 나중에 써먹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3. 한 번의 무거운 복습보다는 가벼운 여러 번의 복습이 효과적이다.

해마에서 장기저장소로의 기억 전환은 주로 수면 시간에 일어납니다. 기억이 단단해지는 이 과정이 자동으로 일어난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 자동 학습 과정의 통로는 시간이 지나면 좁아집니다. 이 통로를 계속해서 넓게 열어주기 위해서는 전환 과정을 계속해서 자극해주어야 합니다. 따라서 공부한 내용을 복습할 때의 팁은 ‘잊어버릴 때쯤 되면 다시 한 번 건드려주기’입니다. 밀도 있게 오랜 시간 한 번 복습하는 것보다 조금 가볍게, 하지만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가볍게 복습해주는 것이 자동 학습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데에 훨씬 도움이 됩니다.


4. 자는 것까지 공부다!

공부는 책이나 강의를 보면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과정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해마 중심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신피질로 전환하는 과정이야말로 학습의 정수입니다. 그렇게 전환된 지식이야말로 안정적이고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환 과정에 수면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하고 충분히 자야합니다. 자는 것까지가 공부입니다!


공부의 레시피가 있을까?

시중에 범람하는 수많은 공부법 책처럼 저 역시 최대한 구체적인 공부법을 제시해보려고 노력 했습니다만, 자기계발관련 책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시원한 느낌을 받진 못하셨을 것 같습니다.
많은 아이들과 학부모들을 상담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요즘 아이들은 레시피에 대한 욕구가 강한 것 같더군요. 마치 제과제빵의 레시피처럼요. 예를 들어, "버터 50g + 밀가루 120g + 설탕 20g" 이렇게 배합하면 영락없이 쿠키가 나오는 것과 같이, '이렇게 하면 1등급을 찍는다.'와 같은 레시피를 원하더군요.
하지만 운전, 연애, 사업 성공, 주식 투자 성공... 이런 것들과 마찬가지로 공부에는 레시피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운전, 연애, 주식 투자, 공부의 공통점이 뭘까요? 수많은 변수들이 동시에 작용하는 분야라는 거죠. 이걸 다변수(multivariate) 함수라고 하는데, 가능한 변수들의 조합의 가능성이 무한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딱히 이대로 하면 성공한다는 레시피를 알려준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단순하게 말해서 아이들이 처한 상황이 너무 다양해서 모든 경우에 작동하는 공부법이란 있을 수 없다는 거죠. 예를 들어, 기본적인 문해력이 완성된 아이와, 아직 제 연령의 책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같은 공부법이 적용될 수 없는 건 당연합니다.

"그럼 네가 말한 공부법은 뭐야?"라고 의문을 품으실 겁니다. 제가 말한 공부법은 사실 레시피라기보다는, 요리를 예로 들자면 '요리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거죠. "채소를 볶을 땐 강한 불에 짧게 익힌다.", "고기는 기본적으로 밑간을 한다.", "기름과 산의 적절한 사용이 음식의 풍미에 매우 큰 영향을 준다." 뭐 이런 거죠.

여전히 답답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저도 공부에 대한 감을 찾기 전에는 공부법을 찾아 미친듯이 찾아 헤맸거든요. 하지만 역시 요리를 예로 들자면, 요리의 원칙에 대한 숙지는 요리 실력에 정말로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 제가 말씀드린 공부의 원칙을 곰곰히 고민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반적인 공부법은 없지만, 자신만의 공부에 대한 감을 찾는 방법은 있습니다. 사실 이게 '인공지능의 학습 원리'와 매우 닮아 있습니다. 차후에 또 다른 글에서 설명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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