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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으면 사라지는 아이

by 이지원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잊은 채로 지냈다. 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 속에서 치이며 살았다.

내가 알던 내가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나의 방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가져온 두 권의 책이 책장 안에서 깊이 잠든 것을 보았다. 하고 싶지 않은 것들 속에서 뚜렷이 빛나는 책이었다.


오랜만에 펜을 잡아 그림을 그렸다. 전과는 달리 꽤나 괜찮은 그림이 그려져서, 그제야 살아 있음을 느꼈다. 여전히 나에게 여유 따위는 없고, 좋아하는 것들이 잠시 곁을 떠나 있지만 어떻게든 나를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한다. 여기에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모습이 농땡이처럼 보일까, 어떨까. 그러나 나에게는 오래간만에 펜을 잡아 그림을 그리고, 오래간만에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것이 숨을 쉬는 것과도 같다. 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 몸속에 살아있을 영혼이 꺼지고 마는 것. 아마도 나이가 들어 머리가 하얗게 세는 날까지 사랑을 말할 수 있는, 내가 가진 유일한 것.


가슴을 열면, 가장 안쪽에서 작은 갓난아이가 나온다. 이 안에, 내가 가진 모든 것들 안에 아직까지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작은 어린아이. 너무나도 사랑하면서도 너무나도 미운 것. 밖에 드러내어서는 안 되는 것. 무엇을 위해서 너를 숨기고, 무엇을 위해서 우는 입을 막으려 했는지. 울지 않으면 죽어버리고야 마는 아이를.


나는 너를 있는 힘껏 잡아 누르면서도, 너의 얼굴이 푸르게 식지 않길 바라.


'어째서 다른 사람들과 같은 꿈을 꾸지 않는가?'라는 의문의 중심에는 이 어린아이가 있었다. 나는 나와 같은 꿈을 꾸고, 끝내 그것을 이룬 사람들과 같은 모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아니, 깨달았다기보다는 미리 포기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정말로 가능성이란 것이 있을지도 몰라. 조금만 더 하면, 정말로 간절히 매달리면 나는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여기서 벗어나, 내가 정말 나로 피어날지도 몰라. 남들과 같은 얼굴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책임을 지기 싫었다. '조금만 더'라는 막연한 희망 속에 나를 영원히 가두게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남들이 전부 자리를 잡았을 때,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채로 계속 표류하게 될 것만 같아 무서웠다. 빨리, 더 빨리 자리를 잡아서 정말 괜찮은 어른이 되어야 할 것만 같았다. 누구의 어깨도 빌리고 싶지 않았고 부모의 근심 어린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중심이 향하는 곳은 빠르게 자리를 잡을 수 없는, 불확실함이 가득한 세상이었다.


그렇다 해도 나는, 계속해서 파란 하늘을 그리고 싶어.

계속해서 꽃과 나무를 보고 싶어.

계속해서 나를 백지 속에 녹여내고 싶어.


작은 책장 속의 책이 더 이상 좀의 먹이가 되지 않게,

내가 더 이상 습하고 캄캄한 방 안에서 말라죽지 않게.


내가 계속 가슴 안의 아이를 살려낼 수 있게.


너는, 나는, 울지 않으면 사라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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