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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by 이지원


먼 곳에 있는 것만 같다면 놓아주는 것도 방법이라고, 나는 이제껏 그렇게 생각했다. 음식이 썩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꺼지기 마련이라, 붙잡으려 해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맛본 것은 뱉어내면 그만이고 영양가가 사라졌다면 끊어내면 그만이라고, 나는 애써 사람과의 관계에 연연하지 않으려 했었다. 균열의 징조가 보이면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섰다. 그리고 홀로 남은 채로 불안에 떨기를 반복했다.


단맛을 잊지 못해 계속해서 단맛을 찾고, 나의 살가죽을 들어 결핍과 고통을, 결코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보이고 말았다. 변한 것은 나일까, 남일까.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홀로 있는 시간마저도 누군가를 그리워한다거나 기대는 시간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남아 있던 습관이었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맛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어떠한 변화를 경험할 때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불안을 어찌할 방법이 없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것을 해소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저 글을 통해 풀어낼 수밖에는 없다. 내가 알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바뀌고, 목구멍을 거쳐 뱃속으로 무겁게 침잠해 있던 모든 욕구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정말로 나의 밑바닥을 마주했던 것도 같다. 같은 언어를 사용할 수 없는 동물에게 의존했던 것도, 감정이라곤 느낄 수 없는 단순한 솜뭉치에 불과한 물건에게서 사랑을 느끼려 했던 것도, 그 솜뭉치가 품었던 체온이 사실은 나의 것이었다는 사실마저도 모른 척을 하고 살았다.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어. 기대려 해선 안 돼. 무게를 실어선 안 돼. 그런 경고로 스스로를 자꾸만 다그쳤던 탓이다. 그러나 억눌렀던 것은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한 번에 분출되기 마련이다.


오 년, 혹은 그보다도 더 오랜 시간 동안 남에게 건강하게 기대는 법이라고는 조금도 익히지 못했던 탓이다.


만약에 말이야. 나를 짓눌렀던 그 끔찍한 괴롭힘을 버티고 어떻게든 중학교를 졸업했다면, 그래서 무사히 고등학교를 들어갔다면, 어떻게든 졸업을 하고 여기에 던져졌더라면 나는 좀 더 건강한 사람이 되어 있었을까? 혹은 지금보다도 더 불건강한 사람이 되어 있었을까?


단 하나의 길밖에 가보지 못한 나는 감히 다른 길에 대해 무어라 판단을 할 수가 없다. 깨진 곳이 많은 정신을 추스르고 닦아 내어 그저 홀로 살아갈 뿐이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나는 모두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니 그만 사라지는 게 나아요."


나는 그런 말을 지겹도록 입에 담았었다. 의존성이 없고, 꽤나 독립적으로 살아왔다고 자신을 했건만 그러한 모습들은 전부 나의 의존과 불안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었다. 나는 절대 사람에게 의존을 하지 않는다고, 남이 떠나가거나 남는 것에 어떠한 동요도 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마저 속이며 살아왔던 것이다.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맹세했던 나의 못난 의존과 불안이 사람이 사는 동네에 머리를 디밀 적마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못 견디도록 괴로워했다. 저들은 괜찮다고 하지만, 내가 불안을 드러낸 횟수는 어딘가에서 계속 세어지고 있을 것이므로.


'죽음에 대한 충동이 언제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이제야 명확히 답을 할 수가 있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가진 불안과 충동성을 남에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려워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그만큼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순되게도 숨기려 하면 할수록 불안은 더욱 강하게 몸을 움직였다. 가슴과 머리를 뚫고 나와 본래의 감정마저도 흐리게 만드는 그것을, 남을 돌아보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세상에만 빠져들게 만드는 못난 그것을 나는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아예 육체적인 활동마저 끝맺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 것을 돌아보며, 어쩌면 나는 사람 사회에 아직 던져져서는 안 되었을 짐승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떤 약물이 이런 것들을 가라앉힐 수 있을까. 무엇이 이렇게 볼썽사나운 나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 인간이 주는 사랑은 아무리 크다고 해도 끝이 있기 마련이었다. 과하게 파고들면 그만큼 타인의 마음을 썩게 하는 것이니, 차마 사람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름 즈음에나 방문할 병원의 약물이 나를 진정시킬 수 있을까? 어느 정도의 도움은 줄 수 있겠다만 약물 자체가 원인을 해결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가슴 안쪽에 남은 채로 떠는 어린아이를 달래고 말을 듣는 것이 나의 역할이지만 겉도 속도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지금은 양쪽이 똑같이 불안에 떨고 있을 뿐이다. 죽을 때까지 어린아이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곪은 마음을 치료하는 것에는 아마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땅끝까지 떨어졌다 다시 올라오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겠지. 그렇게 살다 보면, 나는 정말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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