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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의 심장

by 이지원

마음 어딘가가 자꾸만 푸르게 물든다.

희끄무레한 녹색으로 번지던 것은, 썩어가던 것들 앞에서 고개를 들고 피어난다.


먹지 않고 아껴두었던, 사실은 잊고 있었던 달걀에 곰팡이가 피었다. 투명하게 안이 보이는 지퍼백에 안겨, 눅눅한 종이백에 한번 더 담긴 열일곱 개의 달걀. 시선이 좀처럼 닿지 않는 책장 위에서, 서로의 몸을 맞댄 채로 캄캄한 어둠을 먹으며 지냈겠지.


하얀 털이 돋아나, 다른 생명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것은 내 두 눈에 새로운 물을 흘려 넣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가진 것들 중, 나의 심장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이구나.

버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내가 품고 있으면 말을 걸어주지 않을까. 하얀 털 아래에서 보드라운 살갗이 생겨나고, 작은 머리가 생기고, 머리 아래로 목이, 그 아래로 심장을 품은 가슴과 배가, 그 아래로 두 다리가 생겨나지 않을까.


얼굴에는 까만 두 눈이 생겨나고, 그 중간에 반질반질한 코가 하나 생기고, 오물거리는 입술이 생겨나지 않을까. 그 사이에서 새어 나올 목소리는, 응, 달고 예쁠 거야. 틀림없이 사랑스러울 거야.

어깨에서 자라난 두 팔을 너는 내게 뻗을 거야. 이제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흰 솜털이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빛에 빛날 거야. 예쁘구나. 달큼한 향기가 퍼져. 나의 숨만 가득했던 이곳에 낯설면서도 익숙한 향기가 돌아와. 아직 어린, 힘이 없는 머리카락이 사랑스러워. 숨을 죽이면 콩콩거리는 심장의 소리가 들려.


오래된 꿈이 태어나, 방 안을 걷고 있구나.


하지만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면, 너를 감싼 분홍빛의 꽃잎은 전부 사라지고, 네 얼굴에 생겨났던 반짝이는 두 눈과 코와 입술이 전부 사라져.




아이의 달큼한 향기 대신에 퀴퀴한 냄새가 감돈다. 온종일 비가 내린, 습기를 머금어 눅눅한 방이다. 작은 발자국이 무리 지었던 책상에서는 빈 페트병이 뒹굴고 있다. 먼지를 뒤집어쓴 자그마한 가방이, 미처 치우지 못한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뒤엉킨 희고 검은 전선들이 살풍경하게 드러나 있다.


나는 뙤약볕에 검게 그을린 피부를 보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보여서,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검게 그을린 손이 말아쥔 눅눅한 종이백의 손잡이에 시선을 던진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가만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물기를 먹어 흐물한 종이백의 입구를 벌리고, 지퍼백의 입술을 우악스럽게 여는 동안 머릿속이 차게 식었다. 정수리가 저릿하게 조여 오는 것이 느껴졌다. 비릿한 비의 냄새가 코를 비집는다. 싫다. 몸서리치도록 싫다.

나는 이제 어린아이의 형상을 완전히 벗은, 곰팡이가 피어 먹지 못하게 되어버린 달걀을 몽땅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서야 숨을 쉬었다. 등줄기가 선뜩하다. 어디에서 옮아온 꿈이던가. 누가 보았던 환상이던가. 부른 적도 없는 손님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에게 있어 깨끗한 방은 사막이었다.

이제 막 건조기에서 꺼내온 새로운 옷을 오래도록 개지 않은 채로, 새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온 침대에 흩뿌리며 잠자리에 들기도 했다. 색색의 옷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사람의 숨소리를, 사랑스러움을 말하는 입술을, 눈을, 그 옷들에서 보았던 것도 같다. 나른하게 부풀어 오른 이불은 나에게 어떤 긴장감을 안겨주었다. 가슴께가 간지러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다 끝내는 그 무엇도 걸치지 않은 채로, 말상대를 늘린 채로 잠에 빠져들었다.


모든 것이 반대로 되어 있었다. 말을 해야 하는 것도 눈을 굴려야 할 것도 여기에, 살과 심장을 가진 것도 여기에 있지만 나의 정신은 자꾸만 색색의 옷을,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페트병과 먼지 덩어리를 사람이라 여기고 말았다. 그러니까 내 손으로 말상대를 전부 치워버린, 잠을 재워 버린 깨끗한 상태를 나는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밋밋한 몸을 휘감은 수많은 팔을, 부드럽고 흐물한 그것들을 나는 사람이라 믿었다.


모든 것이 녹아 한데 뒤섞이던 그 순간을, 나는 사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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