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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끝

by 이지원

머리의 반쪽이 여전히 잠에 빠져 있다.

나는 며칠째 머리 위의 조명을 잠들게 하지도 못한 채로, 해가 저물면 죽은 듯이 잠의 품에 안기고 만다. 매일같이 똑같은 하루. 입을 열지도 못하고 시작되어 끝나는 하루. 나와 같은, 맨살을 가진 사람들. 몇 번이나 사람들의 어깨를 제치고 앞으로 앞으로 달려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삼일 내내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으므로 이제는 생각마저도 좀처럼 돌지 않는다. 까만 재가 되어버린 마음을 조용히 입으로 불어 내몬다. 마지막으로 사람의 품에 안겼던 날을 조용히 떠올리는 것이 그나마의 낙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사람의 눈과 입술이 무섭다.


바퀴에게라도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어. 일과를 마치고 저녁때쯤 방에 돌아와, 나는 그런 생각을 곱씹었다. 질긴 생명을 가진 그 애는 나를 조금이라도 사랑해 줄까. 그 애가 생명이 빠져나간 몸을 갉아먹으면, 그러면 나는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줄 수 있을까.



내가 받고 싶었던 것은 말이지,


사람의 팔, 다른 향을 가진 체온뿐이었는데.


정신을 다른 곳에 맡기고 싶다. 그러나 놓으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정신이 또렷해진다. 정신의 끄트머리를 붙잡는 손을 뿌리치고 간신히 잠에 들 때마다 무거운 꿈에 짓눌린다. 깨어나면 꿈, 다시 깨어나면 또 다른 꿈이다.


생시에, 오랜만에 눌린 부모의 휴대폰 번호가 긴 신호가 되어 흐른다. 가까스로 그들의 귀에 들어간 나의 말은 결국 부모의 대답에, 응, 응, 바빠, 하는 말들에 숨통이 눌린다. 그것들은 아무렇게나 잘린 채로 허공에 나뒹굴어, 나는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가슴 안으로 무겁게 침잠하는 것을 느낀다. 아픈 곳도 없건만 가슴과 목구멍에 큰 덩어리가 걸린다. 아무리 목구멍 안으로 침을 삼켜내어도, 아무리 가슴을 쳐도 내려가지 않아.


노을을 바라본다. 새빨갛게 타오른다. 조금만 더 가까이,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와. 여기 이 건물과, 벌거벗은 나무와, 그들의 다리 밑에 선 나를 잡아먹어 줘.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게 된 나를 삼켜 줘.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에 나는 나의 몸 곳곳에 긴 흔적을 남겼고, 그것들이 뱉어낸 열매가 둥글게 모여 익는 것을 보았다. 샛노란 옷 위에서 점차 꾸덕하게 마르는 것을, 그러다 끝내 가을날 낙엽을 닮은 모양이 되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얼른 식어버렸으면 했어.

그러나 하늘이 검푸르게 식어도, 나의 몸은 여전히 식지 않는다.

봐, 죽은 듯이 누워있어도 불을 비춰 보면 손끝은 여전히 빨긋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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