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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덕분에

by 이지원

한 달 전에 '아주심기'라는 제목의 글을 업로드한 적이 있었는데, 그날을 기점으로 삶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나는 더 이상 나의 우울에 지나칠 정도로 깊이 빠져들지 않았고, 우울에 오래 휘둘리지 않고 나의 길로 돌아왔다. 내가 겪는 모든 부정적인 일들이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은 덕분이다. 놀랍게도, 나의 흔들림이 모두 내가 단단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발밑의 파동이 줄어들었다. 결국 내 고민의 결말은 좋은 쪽으로 트여 있을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그런 확신이 들었다.


이전의 글에서도 자주 보였지만, 나는 매번 욕실에서 몸을 씻으며 생각에 잠기곤 했었다. 뜨거운 물속에 몸을 넣은 채로 죽음을 생각했고, 내 죽음 이후의 것들을 생각했다. 내가 아는 사람 모두에게 짧은 작별인사를 남기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나 숱하게 반복했던 고리타분한 결심 속에서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것에 탄식하며 죽지 못하는 스스로를 탓하고 미워하기도 했다. '멍청한 것, 멍청한 것. 실컷 가라앉으며 살고 있구나.' 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실컷 가라앉았기 때문에 뭍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나의 우울을 지겨울 만큼 바라보지 않았더라면, 나 자신마저 속이며 '마냥 행복한 사람'으로 살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지금처럼 깊이 날 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고,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도 쉽게 자각하지 못했을 것이며, 내 진짜 꿈은 무엇인지, 내 기질은 무엇인지, 더 나아가서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도 깊이 있게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우울을 인식하고 그것을 나만의 표현으로 옮겨 피워내는 과정이 있었기에 나를 볼 수 있었다. 이 바닷속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마음이 둥글게 불러올 만큼 감정의 조각을 수집한 덕분에, 타인의 우울에도 좀 더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나에게 찾아온 우울에 감사하고 있다.

그것을 속이거나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가라앉는 것은 절대로 창피한 것이 아니다.

다음에 또다시 우울이 문을 두드리더라도, 나는 그를 밀어내지 않고 기꺼이 맞아들일 것이다.

감정의 숨을 억지로 참아서는 안 된다.

새로운 숨을 마시기 위해서는 뱉어내는 과정이 당연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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