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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Sep 01. 2024

꿈을 꾸었던 가을

 열다섯 살에 다리 수술을 했고 그때는 거의 홀로 지냈다. 다리와 발 이곳저곳에 흉터가 남았고 한동안 넓적다리까지 모두 감싸는 통 깁스를 한 상태로 지내야 했다.

거기서 외로움을 느꼈냐 하면 딱히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프고 무거운 몸에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돌려야 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 얼굴을 마주 본 채로 지냈던 적이 많았다. 거울을 보듯이 스스로를 마주 보고 지내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묻는다. 지금은 어떤 기분인지, 많이 아픈지, 행복하다면 왜 행복한지, 슬프다면 왜 슬픈지.


 그렇게 묻고 답하고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하루를 보내다 싫증이 나면 조용히 그림을 그리기도 했었다.

투박하고 거친 선, 탁한 색감. 색연필을 쓰고 싶지 않을 때는 형태를 그려나가던 연필로 대충 색을 칠할 곳만 빗금 표시를 하곤 했다. 그때는 사물을 이루고 있는 색이 전부 같은 계열이라고만 생각해서인지, 색감이 맑지 않고 무거웠다. 생각보다 사물을 이루고 있는 색들이 정말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가을바람이 살랑이는 날에는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 안네 프랑크의 <안네의 일기>,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 머리 앤> 등, 어릴 적부터 즐겨 읽던 소설책을 침대 구석에 쌓아두고 몇 번이나 읽었다. 가장 많이 읽었던 책은 <안네의 일기>와 <빨간 머리 앤>.

 전쟁통 속에서도 작가를 꿈꾸며 꾸준히 글을 써 왔던 소녀 '안네'를 참 좋아했고, 보이는 사물마다 사랑스러운 이름을 지어주거나 엉뚱한 상상을 하며 미소 짓게 하는 '앤'의 모습도 정말 좋아했다. 좋아하는 책의 등장인물과 하루를 보내는 동안에는 괴로움도 슬픔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다리를 감싸고 있는 깁스의 갑갑함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줄었다는 것에 대한 괴로움이나 죄책감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줄거리와 인물들이 기억 속에서 몇 번이나 다시 새겨져도 질리기는커녕 즐겁기만 했다. 책들은 내게 있어 기분을 환기시킬 수 있는 소중한 창구가 되어주었다.


 일상생활로 무사히 복귀한 지 6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책이 좋다. 문학은 나를 꿈꾸게 하고, 꿈은 나를 움직이게 한다. 글과 그림은 지금도 내가 살아가는 원동력의 한 부분이 되어준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스스로 찾은 나의 꿈.

내가 스스로 내게 건넨 등불.


 나를 아프게도 했지만 나를 꿈꾸게도 했던 열다섯 살의 가을은, 지금도 여전히 기억의 안쪽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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