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선택이란 존재하는가
우리는 선택을 두려워한다.
대개 그 선택 자체보다는,
그 선택을 함으로써 잃게 되는
또 다른 가능한 선택을 놓치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 '다른 선택'이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언제나 선택을 두려워한다.
왜일까?
우리는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할까?
만약, 지금의 선택이 아닌, 그 '다른 선택'으로
운명의 배를 띄웠다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결국엔 전혀 다른 세계에 존재할 또 다른 선택을
우리는 여전히 갈구하고 있지는 않을까?
후회 없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이
과연 실제로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또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정말로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한
모든 노력들이 무의미할까?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치부하고,
그 노력조차 아예 포기한다면
우리는 또 그에 대한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은 결과론적인 것처럼 보인다.
결국 이 사유의 끝에는
돌고 도는 의문과 답변만이 우리 앞에 놓인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최선의 선택이란 건
애초에 없다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놓아버리는 것도 큰 용기이다.
과감하게 자존심과 오만함을 버릴 용기이다.
한 선택에 있어 '최선'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대한
논의는 많은 경우 결과론으로 귀결된다.
어떤 선택이 옳았는지는
지나간 시간만이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크고 작은 후회는 피할 수 없다.
우리는 늘 부족한 정보를 바탕으로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한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진부한 말처럼 말이다.
그때 우리에게 정보가 부족했었음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선택 이후의 시간들이 필요하다.
완벽한 선택은 고사하고, 완벽한 모순만이 존재한다
그러니, 완벽한 선택을 고집하기보다는,
불완전한 그 선택을 책임지는 쪽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더 낫다.
당시 결정했던 선택을 '최선'으로 만드는 주체는
그 선택을 내릴 때의 내가 아니다.
그보다는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내가
그 선택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으며,
그 시점의 우리는 정보의 무결성의 관점에서
항상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불완전을 완전으로, 그리고 최선으로 바꾸는 것은
그 선택 이후의 우리 자신이다.
아무리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수많은 고민과 노력을 한다고 해도,
그 완벽해 보이는 고민과 노력 자체에도
불완전함은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다.
즉, 이후의 결과가 어찌 됐든
그때 우리가 내린 선택은 항상 최선이었을 것이다.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기에,
역설적이게도 모든 선택은 최선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