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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인지도 모른다

by 이도한


스스로가 이방인이 된 것 같은 순간들

살다 보면 우리는 한 번씩 그런 느낌을 받는 순간들이 있다.


"정말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나만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는가?"


이렇듯, 우리는 삶에서 종종 '이방인'이 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세상이 기대하는 모습대로 스스로가 반응하지 못할 때, 스스로의 감정이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메말라 있는 것 같이 느껴질 때, 삶이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사회라고 부르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것들이 무의미하고 우습게만 느껴질 때가 그렇다. 가끔은 이렇게, 삶의 대부분의 것들이 부조리하다고 느껴진다.


많은 경우, 우리는 그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반응을 보이기 위해서, 가끔은 가면을 쓴다. 그리고 우리는 사회뿐만 아니라, 스스로조차 속인다. 가짜 감정을 자아내기도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절망하기도 한다. 어떤 사건에 대해 '평균'적인 사회의 반응에서 벗어난 반응을 보인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죄책감에 빠지기도, 자책하기도 한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야. 지금 슬퍼야 하는데, 전혀 슬프지가 않아. 나는 정말 나쁜 사람이야"


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그러다가 결국, 억지로 의미를 만들어내려 애쓰기도 한다. 사회의 평균적인 사고체계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은 느낌은 본능적으로 우리의 생존을 위협한다.


우리는 사회에서 고립되고 싶지 않다. 도태되고 싶지 않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싶다. 이러한 본능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배가 고프면 어떻게 해서든 먹을 것을 찾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다. 죽음을 피하기 위한 자연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재미있다. 모든 사람들은 어떤 부분에서는 평균에서 벗어나는 그러한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평균이라는 것은 결국 통계의 장난일 뿐이다. 우리는 애당초 평균이라는 것을 투명하게 측정할 길이 없다.


그렇게 왜곡된 '평균'적인 사고체계를 하나 정해놓고, 서로 눈치를 보며 그 평균에 맞는 연극을 어느 정도 하며 살아간다. 사실은 때때로 자기도 그곳에서 한참을 벗어난 생각을 하지만, 아닌 척하며 말이다. 마치 그곳에서 벗어난 생각을 하면, 지옥에라도 갈 것처럼 말이다.


까뮈는 이러한 시스템에 정면으로 반항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정말로 세상은 합리적인가?

정말로 세상은 부조리하지 않은가?

정말로 세상은 의미가 있는가?





'정상'범주에서 벗어난 사람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소설 '이방인'의 이 첫 문장은,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당연함의 토대를 순식간에 무너뜨린다. 누군가의 죽음을, 그것도 어머니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무심하게 서술하는 주인공 뫼르소의 태도는,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해 온 인간의 감정과 도덕,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게 한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은 단지 하나의 문학작품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해부하고 해체하며, 다시 새로운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만드는 철학적 제안이다. 이 소설을 통해 우리는 "삶이 의미 없다면, 삶이 그 자체로 부조리하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는 사회가 기대하는 '정상적인 인간상'에서 한참 벗어난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도 흘리지 않고, 태연하게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태양의 따가움을 더 의식한다. 연인이 자기를 사랑하냐고 묻자, 그는 "아마도"라고 말하고, 친구의 중범죄에 무심히 협조한다.


그는 도덕적이지도, 감정적으로 반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무표정한 태도 속에는 오히려 일관되고 정직한 삶의 자세가 담겨 있다. 그는 거짓 감정이나 위선적 사회적 기대에 자신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이며, 현재이며, 감각 그 자체이다. 삶을 수단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가려는 인간이다. 실존주의적 삶의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는 인물이다.


뫼르소의 독백을 보면 처음 들었을 때는 이질감이 드는 것 같으면서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는 그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느껴진다. 외부적인 시선이나 이념, 관념, 관례 같은 것으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순수한 감각과 생각을 그는 여과 없이, 그저 묵묵히 드러낼 뿐이다.


나는 또 한 번의 일요일이 지나갔고, 이제 엄마의 장례는 치러졌고, 그러니 내일은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할 테고, 그러고 보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한 군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타인의 몸에 내 몸을 기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우리는 그렇게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가 길어져서 내 사정을 알게 되면, 그는 유감을 표하면서 처음 만난 사람의 슬픔에 공감하고자 혹은 공감하는 표정을 짓고자 애를 쓰려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관계는 금방 의례적인 차원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내가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다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다. 나는 그 군인으로 하여금 공연히 마음의 부담을 느끼며 불필요한 말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평소에도 규율과 격식에 매여 살아가는 군인이 아닌가.


사실 많은 이들이 나를 매사에 시큰둥하고 귀찮아하는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단지 나는 예의상 혹은 절차상 해야 하는 말이나 행동을 싫어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나는 당연히 그래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달리 말하면 나는 그 누구보다도 솔직한 사람이다. 생각해 보라. 이렇듯 도덕과 관습의 강력한 지배를 받는 세상에서 솔직하게 사는 게 오히려 훨씬 더 힘들고 번거롭고, 그야말로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나는 내 몸이 요구하는 대로, 내 마음이 흐르는 대로 솔직하게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게 그런 진부하고 의례적인 말을 하면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 말을 귓전으로 흘려 듣곤 했다. 들으려 해도 되지 않는다. 그게 바로 나다.


그것은 무척 중요한 것이다. 몸의 감각에 충실함으로써 우리는 솔직해지는 법, 불필요한 것들이나 가식적인 것들을 벗어버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사람들은 레이몽이 뚜쟁이이고 질이 좋지 못한 사람이라며 손가락질한다. 아마도 그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체면과 위신에 매달려 자신을 위장하려 하지 않는다. 도덕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서 좌충우돌하며 맨몸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를 판단하고 비난할 입장에 있지 못하다.


어느 날 마리는 내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녀를 좋아했다. 사랑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내 방식으로 마리를 사랑한다. 나는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그 감정은 일반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의 외부적이고 형식적인 것들에 의해 규정되고 얽매인다. 나는 그 점이 싫다. 왜 사람들은 이 특별한 감정을 꼭 사랑이라는 단어 속에 가둬야만 안심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그렇기에 무의미한 세상

가끔 생각해 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세상은 그 자체로 부조리하다. 모순으로 가득 차있다. 대부분의 것들이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이 자연에서 정말이지 무슨 거대한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싶다. 세상은, 우리의 삶은 외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면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고 바라보는 것이 합리적인 생각처럼 보일 정도이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이 세상이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찰나의 연속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그 과정 자체가 세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리는 수많은 것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작은 것에서도 큰 의미를 찾으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말한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다고, 그렇게 배운다.


뫼르소는 이 부조리함과 무의미함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이 지루하고 관습적인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 그는, 자신의 친구를 칼로 다치게 한, 이름도 모르는 아랍인 남성을 총으로 쏴 죽인다. 한 방을 쏘고, 네 방을 더 쏜다.


그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그는 어떠한 감정적 동요도 없이, 그저 무언가에 홀린 듯 그렇게 살인을 저지른다. 그 순간 그의 눈에는 복수심도, 살인 계획도, 흥분감도 없었다. 그는 그저, 햇빛이 너무 강했고, 칼날의 반짝임이 눈을 찔렀고, 무언가 말로 설명되지 않는 불쾌함과 불편함을 느꼈을 뿐이다.


어차피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인생은 너무도 부조리하여 매 순간 우리를 미혹에 빠트린다. 사랑도 그 미혹 중 하나다. 이제 마리와 나 사이의 관계는 완전히 끝이 났다.

우리는 위안을 얻기 위해 우리 사이의 관계에 집착하는데, 그것이 곧 사랑이다. 때문에 사랑에 지나치게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종교에 매달려 삶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나는 그렇게 마리를 떠나보냈다.


나는 나를 위축시키는 이 삶을 견딜 수 없었다. 나를 마비시키는 이 단조롭고 진부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또다시 이대로 머물러서는 안 되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야 했다. 내가 안주하고 있는 이 세상을 부숴버리고서, 우연적이고 파괴적인 운명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방아쇠를 당길 수도 있었다. 예전에는 내 속에서 이런 반항의 기운을 감지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아마도 엄마의 장례식을 전후하여 내 속에서 모종의 변화가 일어난 게 분명했다.


나는 땀과 태양, 바다와 칼날의 반사광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문을 두드렸다. 불행이 시작되는 문을.


내 전 존재가 팽팽하게 긴장되었고, 나는 권총을 힘껏 쥐었다. 왜 총을 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왜 하필 이 남자라는 말인가.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총을 쏘지 않는 건 저 진부한 관습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어차피 진실은 전부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 타협은 있을 수 없다. 그 순간 내 속에서 뭔가가 내게 끝까지 나아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선택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나는 비극적 운명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 순간 남자의 몸은 우리를 압도하는 저 도저한 태양과도 다르지 않았다.

~중략~ 그런데 왜 총 쏘기를 멈춰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멈춰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축 늘어진 몸에 네 발을 더 쏘았다. 나는 총을 네 발 더 쏘는 것을 선택했다. 다만, 그렇게 선택한 것일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시체에 총알을 계속 박아 넣는 그 비인간적인 선택을 통해, 나는 내 속에서 아직도 뭔가 망설이게 하고 순응하게 하는 마지막 벽을 허물어버리려 한 것이었다.


나는 비합리와 부조리에 나 자신을 맡겨버렸다. 그리하여 돌아갈 길을 스스로 끊었다. 나는 내 반항심을 본능적으로 밀고 나갔다. 아마도 훨씬 나중에야 나는 지금 내가 벌인 행동의 진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며칠 후 신부가 감방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자, 그는 사람들은 때로 자기들이 확신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한 법이라고 타이르듯이 내게 말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 말은 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는 신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는 내가 아무 희망도 없이, 죽어서 완전히 소멸되는 게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물론 나는 두려웠다. 하지만 완전한 소멸이 두렵다고 해도 그게 분명한 진실인 터에, 종교니 철학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에 기대는 건 무의미한 짓이었다.




부조리와 무의미를 받아들이다

뫼르소는 특수 살인죄로 재판을 받게 되고,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그는 그렇게 무의미한 삶의 종말 앞에 서게 된다. 그는 그 재판 과정도 결국 무의미하고 부조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그의 살인에 분노하는 까닭은, 그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보다는, 그가 살인을 하고도 사회에서 기대하는 반응, 이를테면 죄책감이나 반성, 눈물의 호소 같은 것들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살인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건까지 끌고 와서 뫼르소를 악마화하는 대목에서 그 부조리에 대한 확신을 한다.


기자들은 뫼르소에게 왜 그 남자를 총으로 쏴 죽였냐는 질문보다도 먼저, 왜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그렇게 태연하게 행동하며, 전혀 슬픔을 느끼지 못했냐는 질문을 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살인 자체가 아니었다. 사회의 '평균'적인 기대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한 사람을 처형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을 뿐이다.


그렇게 죽음을 앞둔 순간, 뫼르소는 결국 이 세상의 부조리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모순적으로 그 순간,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삶의 무의미함을 받아들임으로써 삶의 의미를 받아들인다. 뫼르소의 이 깨달음도 그 자체로 부조리한 것이다.


구속된 후에, 나는 곧바로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다. 검사는 커튼을 친 방에서 나를 맞았다. 나를 의자 위에 앉게 하고선 자신은 어둠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모든 게 장난처럼 여겨졌다. 막연하게나마 난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대에 올랐고, 연극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검사는 심문 중에 내게 왜 바닥에 쓰러진 시체에다 총을 쏘았냐고, 그리고 첫 발과 두 번째 발 사이에서 왜 기다렸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나로서는 그때의 내 심정을 그에게 적절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특별한 이유는 없고, 단지 결과적으로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검사는 답변이 무성의하다고 나를 비난했다. 그때 나는 내가 이 무대를 위해 마련된 각본에 따라 검사가 원하는 말을 들려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지 못하면 나는 무척 불리한 입장에 처할 뿐만 아니라, 한순간에 끔찍한 괴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삶은 부조리하고, 이 부조리한 상황에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을 이끌어내는 것은 곧 거짓말을 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검사는 내게 나 자신을 속여서 거짓말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결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검사는 내게 십자가를 내밀며 회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나는 신을 믿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 힘겹고 두렵고 이해할 수 없는 삶에서 도피하기 위해 자살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자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육체적 자살이고, 다른 하나는 형이상학적 혹은 정신적 자살이다. 당연히 육체적 자살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고, 정신적 자살은 종교나 철학 속으로 숨어들어 그로부터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다.

요컨대 종교에 귀의하여 모든 것을 신에게 귀착시키는 것은 곧 삶에 등을 돌리는 것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의 전능함을 부르짖는 검사의 행동에서 나는 이미 정신적으로 죽은 자의 광기를 보았다.


그렇게 많은 잠을 자고 깨어 있는 동안에는 과거를 회상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에, 문득 나는 어디에서든 삶이란 곧 감옥에 갇힌 상황과 별 다를 바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살아 있는 우리는 죽음이라는 자물쇠가 채워진 감옥 안에 들어있고, 출구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침내 재판이 시작되었다. 처음 한동안 나는 그 재판의 주인공이 나인 줄로 알았다. 그러나 배심원들은 전차의 긴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익명의 승객들처럼 나를 물끄러미 건너다볼 뿐이었다. 그런가 하면 신문기자들과 경관들은 마치 클럽 같은 곳에서 서로 만난 사이처럼 즐거운 표정으로 담소를 나누었다.

그로 인해 나는 내가 불필요한 존재, 조금은 불청객 같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에게는 자기들의 도덕과 관습을 재확인하고 공고히 하기 위한 절차가 중요할 뿐이고, 나는 그 목적을 위해 동원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러고 보면 법정도 부조리한 우리 삶의 축소판이었다. 모든 게 부조리했다. 나와 가까운 증인들은 모두가 이번 사건이 정당방위에 의해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사는 이 사건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엄마의 장례식 날을 끊임없이 들먹이면서 나를 인륜에 어긋난 패륜아로 몰아나갔고, 마침내는 살인도 나의 그런 성향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행동이었다고 못을 박았다.

그것이 바로 이 재판의 실상이었다. 모든 게 사실이었고, 또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살인을 했기 때문에 기소된 것인지 엄마의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기소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냉혹한 기계장치처럼 굴러가는 인위적인 절차 앞에서 상식은 무력했다.


죽음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죽음이 두려워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피할 뿐이다. 그러나 죽음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신비함이 없다. 일상의 연장 속에서 어느 날 문득 졸지에 찾아오는 것이다.

내가 상고의 기각을 받아들인 것도 그래서이다. 죽는 바에야 어떻게 죽든 언제 죽든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상고를 해서 감형을 받든, 만에 하나 특사로 풀려나든, 약간의 시간을 구걸하여 얻는 것일 따름이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나를 불행하게 만든 건 결코 나의 사고방식이 아니다. 타인들의 사고방식이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제 적어도 나는 그동안 내가 무엇에 대해 저항해 왔는지 알게 되었다. 아마도 감옥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그리고 저들이 나를 조롱하며 궁지로 몰아넣지 않았으면 내내 모르고 지냈을 것이다.

이제 비로소 나는 지금까지 내가 왜 그렇듯 남들과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했는지 분명히 인식할 수 있었다.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자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이 열렸다. 이 세계 혹은 이 우주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이 우주는 우리 인간들에 대해 무관심하다. 하지만 우리가 편견을 버리고 실존[본질이 아닌] 그 자체의 고통과 행복을 받아들이며 우주의 진실에 다가설 때, 우주는 우리에게 다정하게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계는 우리에게 무관심하지만 다정하고, 다정하지만 무관심하다. 우리와 세계는 서로 닮아있고 형제와도 같다.


재판장은 내게 사형을 선고했다. 나는 존속살해범보다도 더 사회를 위협하는 인물로서 관용보다는 정의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방청객들이 나를 낯선 표정으로 바라보았는데, 그건 분명 일종의 경의의 표현이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원한 건 어쩌면 바로 그 경의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의 마비감에서 벗어난 자, 전체의 권위에 도전한 자, 삶의 부조리함을 꿰뚫어 본 자에게 보내는 경의의 표현 말이다.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찾다

까뮈는 그 모든 태도 이전에, 정직하게 부조리를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실한 인간의 자세라고 말한다. 그것은 패배나 회피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힘이다. 삶이 의미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우리는 더 깊이 삶을 살아낼 수 있다.


이는 그의 다른 작품인 '시지프 신화'에서도 엿볼 수 있는 삶의 태도이다. 실존주의는 자칫하면 허무주의와 혼동될 수 있는 삶의 태도이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만 주장하다니,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삶이 그 자체로 없으면 그대로 죽어버리라는 말인가?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거대한 돌을 산 꼭대기까지 올렸다가 그 돌이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 다시 돌을 올리는 반복되는 형벌을 받는 와중에, 그 무의미한 과정 그 자체에서 모순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낸 시지프처럼, 우리는 이 무의미한 세상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아가며 살아가야 한다. 당장 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의 부조리함과 무의미함을 받아들인 이후라면, 우리의 선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1. 기성의 거짓된 의미에 기대어 살아가기 : 종교, 사회적 가치, 위선적 도덕에 기대기

2. 허무주의에 빠지기 : 아무것도 믿지 않고 그대로 무너져버리기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 : 의미 없음 속에서도 끝까지 삶을 끌어안기


그중, 카뮈가 그의 작품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에서 제시하는 삶의 방향은 세 번째 선택이다.

뫼르소도 3번을 택한다.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며, 신부가 제시하는 종교적 구원도 부정하며, 뜨거운 태양과 자연의 감각을 마지막까지 받아들인다.


"나는 모든 것이 처음인 것처럼 세상을 맞이하고 싶었다."
"나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포기의 선언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가장 명료한 수용이다.




그렇다면 이 무의미한 삶을,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의미를 찾는다. 사랑의 의미, 노동의 의미, 성공의 의미, 나의 존재 이유까지. 하지만 까뮈는 '이방인'이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 묻는다. "그 의미들은 과연 진짜인가? 혹은 우리가 던진 기대에 세계가 대답해 준 적이 있었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정답은 없다. 하지만 뫼르소는 한 가지 방식으로 답한다. 의미를 강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며, 허위의 구원 대신 맨몸으로 세상을 살아내는 것. 삶은 그 자체로 부조리하고, 때로 공허하며,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모순 그 자체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삶을 창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누구의 것도 아닌,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하루하루의 감각과 태도 속에서 말이다.


삶은 의미 없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무의미 속에서도 온전히 살아내는 것, 그 자체가 가장 인간적인 반응이다. 그러니 우리도, 이 삶의 공허와 무의미와 부조리와 허무의 심연을 건너, 우리만의 태양 아래에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의미가 없기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의미가 전혀 없이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는 그 자유로운 태도를 가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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