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이 까칠한 여름, 찬거리를 사러 시장에 갔다. 마침 오일장이 서는 날이라 초입부터 인파로 북적인다. 천천히 걸으며 당진 천까지 길게 늘어선 좌판대 물건들을 눈요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시골장은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생생한 활기로 퍼덕인다.
리어카에 가득 실린 열무 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열무는 크고 싱싱한 것보다 적당한 크기에 야들야들 부드럽고 좀 힘이 없어 보이는 게 맛있다. 줄기가 너무 검푸르면 비료를 많이 써 쓴맛이 난다고 왕년에 농사 꽤나 지으셨던 시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멀리서 보이는 연록의 유순함에 이끌린 나는 열무 더미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았다. 옆에 잠자코 서 계신 농부 할아버지는 땀에 찌들어 빛이 바래고 목이 늘어난 난닝구를 입고 있었다. 황토색으로 그을린 얼굴을 밀짚모자로 반쯤 가린 채 손님이 오거나 말거나 우두커니 그냥 서 있을 뿐이었다.
열무 단을 가까이 들여다본 나는 깜짝 놀랐다. 잎사귀마다 구멍이 숭숭 말도 못 하게 뚫려 있었다. 농약 치는 시기를 놓쳐서인지 아니면 친환경을 고수한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보기에는 좋지 않았다. 힘들여 지은 농작물도 상품 가치가 떨어지면 떨이라도 빨리 팔아야 하는데 할아버지는 시세 그대로를 부르신다. 묻기도 전에 비닐봉지부터 꺼내는 여느 상인들의 수완도 없는 고지식한 모습이다.
열무 자체는 짤막하니 여리고 맛있어 보였지만 선뜻 내키지 않아 망설였다. 행인들도 이왕이면 흠집 없는 신선한 농작물을 사려는 듯 흘낏 눈길 한번 주더니 그냥 지나친다. 하루 해가 지나도 팔리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발길을 돌려 저만치 멀어지는데 남편이 옆에서 혼자 중얼거리듯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할아버지 열무 사줬으면 좋겠는데......”
“그래?”
남편의 의중을 떠보며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할아버지 구멍 숭숭 열무 두 단을 샀다. 같이 버무리면 한결 맛나는 얼갈이도 한 단 샀다.
집에 오자마자 다듬고 소금에 절이고 풀을 쒀 열무김치를 담았다. 간 좀 보라며 남편을 부르니 거실에서 티비를 보다 말고 얼른 달려와 손가락으로 야들한 열무 줄기 하나를 입속으로 가져가더니 익으면 맛있겠다고 평을 한다. 맛있는 건 벌레가 먼저 알아 이렇게 구멍이 숭숭한 거라며 내일쯤 밥상에 오르면 슴슴하니 시원하겠다고 만족한 표정이다.
할아버지 열무가 맛있게 익으면 된장찌개 끓여 매콤 달큰 열무 비빔밥도 해 먹고, 야들한 열무에 초고추장 한 스푼 넣어 비빔국수도 말아먹어야겠다. 생각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이고 무더운 여름이 저 멀리 달아날 것 같다.
그나저나 할아버지는 그 많은 열무를 다 파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