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의 그리움

by 홍정임

냄새나 향기에 의해 잊혔던 기억이 갑자기 되살아나는 현상을 ‘마들렌 효과(madelein effect)’라 한다. 마들렌은 프랑스의 전통 과자로 조가비 모양의 작은 카스텔라 빵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 한 조각을 홍차에 적셔 입에 넣는 순간 어릴 적 기억이 되살아났다는 장면에서 비롯됐으며 프루스트 효과(proust effect)라고도 부른다.

후각은 시각, 청각보다 빠르게 기억을 불러오며 이러한 기억소환은 단순한 회상을 넘어 그때의 감성, 분위기, 온도, 신체의 감각까지 데려온다. 향기가 공기 중에 확산되어 코끝에 닿는 순간, 무의식의 창고에서 웅크리고 있던 과거의 인상 깊은 경험이 전구처럼 반짝 켜진다. 마들렌 효과가 타인에게 전이된 경우도 있다.

어느 날 한적한 동네 외곽에서 차를 마신 후, 지인과 우연히 시골 미술관에 들렀다. 완만한 언덕 위에 단출하게 자리한 하얀 미술관에서 그리움의 실체를 엿보았다. 인기척 소리를 들었는지 전시장 쪽문을 열고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나왔다. 그림들 앞을 지날 때마다 이런저런 해설을 해 주셨는데, 우리는 한 그림 앞에 오랫동안 멈춰 섰다.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남자의 아득한 눈 속에 뿌리 깊게 내린 그리움이 있었다. 그 그리움의 근원은 할머니의 냄새였다. 그가 느낀 향기의 기억이 내게도 전해졌다. 미술관을 빠져나와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 미술관

휘어진 고샅길 언덕 위 시골 미술관

인적 없는 하얀 바람벽에 쪽 진 할머니 걸려 있다

설핏 들리는 인기척에

쪽문 열고 맞이한 희끗한 반백의 사내

어색함을 녹이는 통성명 후 밉지 않은 그의 넋두리

할머니의 냄새가 그립다고

그래요? 내가 추임새를 넣자

쇠 냄새가 났어요. 그가 말했다

하얀 달이 창백한 새벽녘

할머니의 분주한 걸음마다 따라온 찬 공기

꼬깃한 삼베적삼 쪼그라든 가슴팍에 얼굴 묻으면

코끝에 스멀스멀 피어나던 시퍼런 쇠 냄새

쇠 냄새가 뭘까

들고 다니던 텀블러와 지갑 속 동전을 상상하며

폐부 깊숙이 나는 숨을 들이켰다

할머니가 이 그림을 보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낯선 이의 공감에 미열이 오른 사내는

빗장 열어 케케묵은 서사를 끄집어냈다

코 흘릴 적에 할머니의 치마 속으로 자주 숨었어요

할머니의 치마 속으로...

그래요? 방패 막이었군요

흘낏 본 사내의 두 눈이 아득한 곳에 멈춰 섰다

순간 머릿속이 전구처럼 반짝였다

향수는 아찔함이 코끝에 스치는 찰나이거나

기억 창고에서 까마득히 묵은 그리움 하나 꺼내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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