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의 숫자

by 홍정임

오래전, 주부들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남편 회사 직원이 잊히지 않는 말을 했다. 같이 웃고 떠들며 농담처럼 한 말이다.

노동의 대가로 주어지는 월급은 상사한테 듣기 싫은 험한 욕을 먹고 발길로 걷어차이는 수모까지 포함된 액수라고. 웃자고 한 말이 날카로운 뼈가 되어 찔리는 순간이었다.


통장에 매달 찍히는 한 줄 숫자는 잔인하다. 숫자가 길고 높을수록 포만감이 크지만, 감정노동 강도도 그만큼 비례한다. 숫자는 한 가족의 피와 살을 만들기에 위대하다. 잔인하면서 위대한 모순의 숫자. 이렇게 힘이 센 숫자 앞에 남편은 성실과 인내를 무기로 37년간 몸을 바쳤다.

서해안을 매립해 세워진 제철공장에서 거센 칼바람을 맞으며 몇 번의 구조조정에도 흔들리지 않고 제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남편의 몫인 숫자를 밖으로 새지 않게 차곡차곡 모아 어느 순간 보여주는 거다. 서프라이즈처럼.

일선에서 물러나는 날, 노고를 위로하며 내가 모은 숫자를 읊조리자, 남편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고생했어”라고 되려 내게 말했다. 피 같은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어 억척스레 모은 내가 고생한 걸까?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의 고생을 인정하고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이가 되었다. 잔인하고 위대해서 힘센 숫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결속력을 단단하고 끈끈하게 이어줬다.

남편의 머리에 하얀 눈꽃이 성글게 피었고, 탄탄하고 야무지던 어깨는 중력과 세파에 시달려 아래로 조금 처져 예전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그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이 아려온다.

이제 인생 2막이 오르고 있다. 다시 시작이다.



어른으로 산 당신


막막한 안개에 갇혀

움찔, 발걸음 얼음처럼 굳을 때

태양이 들숨으로 삼킬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사람

그가 살아온 무기는 성실과 인내

세상을 믿지 못하는 조바심은

내면 깊숙이 생채기를 남기지만

참는 법은 모든 것을 지나가게 한다

누구나 어른이 되지만

진정한 어른은

괜찮은 날도 괜찮지 않은 날도

힘이 나는 날도 주저앉고 싶은 날도

폭풍우 속에서도 단단히 균형 잡고

자기 자리에서 무너지지 않게 버티는 일

쉽지 않은 길

소리 없이 전진하며 여기까지

한 생을 건너온 당신은 참으로 반듯한 어른

그런 어른과 같은 시간을 지나온 나는

얼마나 다행인지

얼마나 복이 넘치는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소리 없는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