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면 삼키고, 달면 뱉고
난 여전히 커피가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비싼 돈 턱턱 내며 곧잘 사 먹는다.
심지어 어떤 커피가 맛있고, 나의 취향은 어떻고, 어쩌고 저쩌고 참 잘도 떠들어댄다.
종종 카페를 가면 나는 늘 어렵지 않게 커피를 주문한다. 다만 이따금씩 당황스러운 건, 어떤 곳은 내게 원두를 선택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내심 그 카페가 조금 원망스러운데, 나는 세상에 어떤 종류의 원두가 있는지, 그래서 커피 맛이 어떻게 다르다는 건지 사실 전혀 모른다. 늘 사 먹는 커피지만, 내게 커피란 그저 쓴 액체일 뿐이라 어떤 원두를 갈아 넣은 것인지, 향은 또 어떻고 산미는 어떤지 실상 궁금하지조차 않다. 결국, 가장 쓰지 않아 보이는 이름 하나를 대충 골라 잡는다.
찰나의 기분에 따라 선택된 그 원두는, 무참히 갈리고, 미련 없이 달여져 나에게로 온다. 그리고 난 그 원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누군가 내게 커피의 맛을 물을 때면, 나는 내가 급히 훑었던 원두의 특징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려 애쓴다.
산미가 약하고 과일 맛이 남
“이 원두, 산미는 약하고 과일 맛이 나서 좋아”
거짓말. 그저 쓴 것이 싫어, 쓰인 설명 뒤로 멋대로 숨어버릴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신기하게, 이 커피는 여전히 메뉴판에 적힌 대로 맛이 나는 것처럼 군다.
설령 이 커피가 내가 고른 그 원두가 아니어도, 심지어 다른 누군가가 주문한 커피와 바뀌었어도,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이 커피는 분명 산미는 약하고, 과일맛이 나는 그런 커피가 되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커피 삼킬 줄 알면,
커피 맛도 느껴지는 줄 아는
그런 사람인가 보다, 나는.
문득 그런 사실을 깨닫는 순간, 어쩐지 속이 메스꺼웠다. 우연히 녹음기에 녹음된 나의 목소리를 들은 기분이랄까.
익숙한 듯 낯설고, 낯선데도 내 것인 그 기괴한 불일치.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이 세상에 쓴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본디 인간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법이라던데, 나는 어째서 기어이 이 쓴 것을 찾아 꾸역꾸역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는 걸까. 심지어 그 쓴맛에 기꺼이 돈까지 내가며 말이다. 손에 커피잔은 여전히 온기를 품고 있었지만, 내 안의 무언가는 식어 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뜨거운 액체 속에서 형체도 없이 녹아내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아무 맛도, 아무 나도 남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매일 아침 카페에 들러 주문해 온 것은 원두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던 것은 아닐까.
타인의 시선이나 세상의 정답이라는 메뉴판에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기 위해, 돌아보면 그저, 매일같이 스스로를 무참히 갈고 미련 없이 달여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추출되어 나온 나를 세상에 내놓고 나면, 찌꺼기처럼 남겨진 진짜 나는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가.
여전히 나는 쓰지 않을 것 같은 원두를 치열하게 고르고, 커피를 주문하며, 원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언젠가, 메뉴판이 아닌 나의 마음이 가리키는
그런 나다움을 움켜쥘 날이 찾아올까.
그때는 내 손으로, 내 호오를 온전히 들이킬 수 있을까.
나로서, 들이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