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가 왜 이리 힘들지?

발달장애 아이와 독박육아 워킹맘

by 옥샘

오늘이 벌써 10월 5일이라니 이렇게 또 1년이 몇 달 남지 않은 것이 갑자기 초초하게 느껴진다. 22년 6월쯤 아이가 발달이 늦은 것 같다고 어린이집에서 통합보육을 권했고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열심히 준비해서 시작한 작은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했고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별다를 것 없이 잘 자라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교육열이 타오르던 엄마는 이것저것 시켜보려고 애를 썼지만 제대로 집중해서 해낸 일이 없어 그저 손 놓고 있는 상태였다. 그게 다 발달이 늦어서 그런 거였다니 그렇게 생각하면 또 말이 된다. 하지만 나는 너무 억울했다.


결혼한 지 7년 만에 가진 아이. 결혼 후 2~3년은 신혼을 즐기자며 피임을 했고, 피임을 그만두었는데도 아이가 잘 들어서지 않아서 난임병원에 다니고 그 병원에서 배란유도제를 먹고 숙제를 하고 임신을 했다. 두 번은 아기집도 보기 전에 보냈고 한 번은 자궁 외 임신으로 치료를 받기도 했는데 마침 다니던 회사에 어려운 일이 많아서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난임병원에 아이를 데리고 오는 여자들을 보면 속으로 욕을 했고, 지나는 아이들을 보면 속이 쓰리고, 아무 이벤트 없이 임신과 출산을 겪는 친구들을 질투해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지경이 되어있었다. 일을 그만둬야 했다.


언제나 공무원 부부가 되고 싶어 했던 남편은 공무원 공부를 권했고 나는 일을 그만둔 뒤 퇴직금을 털어 다른 지역 이모집에서 공무원 학원을 다녔다. 매일 아침 일어나 학원에서 공부하고 처음 만나는 20대 학생들이랑 어울려 점심 먹고 버스 타고 이모집에 와서 저녁 먹고 일찍 자고 학원 주변을 걷고 계단을 오르내리니 임신하기 좋은 몸이 되었는지 공무원 공부를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자연임신이 되었다. 하지만 이왕 마음먹은 거 1년 치 학비도 미리 냈고 환불은 어려웠고 얼마 전 학원잡지에 실린 임신 중 공부로 공무원이 된 주부사연에 감명을 받았던지라 계속해보기로 했다. 그 와중에 가산점이 있다는 직업상담사 자격증도 따고 학원 내 시험에서 1등을 하기도 하는 등 꽤 좋은 성과를 이루었지만 곧 자습실 방향제가 분사될 때마다 구역질을 하고 수업시간에는 병든 닭처럼 졸기 시작했다. 임당 검사는 통과하지 못했고 시간 맞춰 식사하며 혈당측정기로 측정한 결과를 노트에 적어야 했다.


공부하기 싫었는데 잘됐다. 사실 이게 내 속마음이었을 것이다. 물론 재미있는 공부도 있었다. 국어, 영어, 사회, 행정학은 모두 적성에도 맞고 공부도 재미있어서 늘 좋은 성적을 얻었는데 필수과목인 한국사는 학교 다닐 때도 도저히 좋아지지 않던 과목이었는데 공무원 한국사는 하기도 싫고 성과도 좋지 않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왔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쉬운 일이다. 지금의 어려운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긴 했을 텐데.


이런저런 핑계로 요양하러 집으로 돌아왔고 그때부터는 이사준비와 아이맞이 준비로 바쁘게 보냈다. 살던 집은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의 3층이었는데 구조가 특이해 지하 2층부터 시작되는 집이라 사실은 5층을 걸어 올라가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이도 태어나는데 여길 오르내릴 순 없지.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기로 마음먹고 집을 알아보고 이사를 했다. 가져갈 짐이라곤 몇 가지 없어서 차로 몇 개씩 날라 이사를 하고 새로운 집에는 새로운 가전과 가구를 사서 들였다. 아이 맞이 준비였지만 어쩌면 신혼집을 꾸미는 것 같은 설렘과 즐거움을 느꼈다. 아이를 핑계로 이렇게 가족들이 나에게 친절하다니. 뱃속의 아이를 핑계로 이것저것 사들이면서 주변사람들의 호의 어린 눈길과 다정한 말들까지 더해지니 왜 임신에 중독되는 사람이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남편과의 관계도 최상이었다. 넓은 아파트로 집을 옮기니 남편은 한마디 했다. '이게 사람 사는 거지.' 그동안 살던 집은 남편의 나이를 생각하면 사실 좀 초라하긴 했지. 바라왔던 아이도 태어나고 우리 인생은 더없이 행복하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났다.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고, 태어났을 때 울음소리가 작았던 것이 생각난다. 아이는 산소포화도가 좀 낮다며 NICU 신생아 집중치료실에 갔고 나는 출혈이 잘 잡히지 않아 수술실에 한 시간쯤 있었다. 수혈을 받으면서 회복실로 옮겼을 때 남편이 정말 하얗게 질려서 내가 죽는 줄 알았다며 당황한 얼굴을 했다. 옆의 산모는 들어가자마자 나왔는데 내가 너무 안 나와서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산소포화도가 낮았던 게 원인일까? 내가 제왕절개를 선택한 게 문제였을까? 뱃속에 더 있었더라면? 자연분만이었더라면? 아이는 발달이 늦지 않았을까?


아이를 낳고 입원기간, 조리원, 집에서의 몸조리. 한두 달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백일을 맞아 백일상 준비하고 집에서 백일을 축하했다. 비슷한 시기 아이를 낳은 친구들과 교류하고 물건을 물려받고 물려주고, 지금 생각하면 왜 그리 답답해했었는지 그냥 집에 있으면서 아이를 많이 안아주고 눈을 바라봐주고 이야기를 들려주기에도 아까웠던 순간들. 6개월쯤 되어서는 친구들과 어울려 문화센터도 가고, 이유식카페에서 만나 수다 떨면서 애들 이유식도 먹이고 새로운 아이템이 뭐가 좋더라 그러면 우르르 따라 사고 사람들이 육아맘들 생각하면서 떠올리는 그런 이미지 속 사람들처럼 지냈다.


아이가 돌을 맞을 때 즈음해서 슬슬 퇴직금도 다 쓰고 내 이름으로 있던 예금도 야금야금 꺼내 쓰고 이래저래 흩어지는 돈을 보면서 다시 일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원래 각자의 급여를 따로 관리하고 누가 생활비를 낸다는 개념 없이 그때그때 지출하고 있었다. 내가 마트쇼핑, 외식비, 여가비 등을 대부분 부담하고 남편은 저축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생활비를 따로 받지 않고 사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어서 남편은 생활비를 줘야 한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지 못했다. 내가 생활비를 달라고 하자 퍽 당황한 것 같았지만 매달 고정적으로 내야 하는 금액들을 설명해 주었더니 납득하고 매달 일정금액을 보내주기로 했고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보내주고 있다. 하지만 부족했다. 매달 지출하는 금액을 모두 커버할 수는 없었다. 일을 해야 했다.


집에서 풍선을 만들어 파는 사업을 시작했고 큰돈은 아니라도 소소하게 용돈벌이 정도를 하면서 아이를 키우던 중 18개월경 다니던 몬테소리 센터 선생님이 우리 아이의 호명반응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유튜브에 '호명반응'이라고 검색해 보니 나오는 말들은 내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 자폐스펙트럼?

이러고 앉아있을 수는 없지. 병원예약이라도 해야 하나? 24개월 전에 발견하면 예후가 좋다던데? 어디에 예약해야 하지? 한참 기다려야 한다는데? 갑자기 몰아치는 생각들에 잡아먹히고 있었는데, 남편 동료가 추천해 준 놀이치료센터에 상담을 받으러 가보기로 했다. 상담결과 언어는 6개월 정도 지연이 있고, 자폐는 아닌 거 같다며 놀이치료를 권해서 다니기 시작했다.


이때라도 병원을 예약해서 진료를 기다렸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한다. 뇌발달의 제일 중요한 시기라는 24개월 이전을 놓친 것에 대해서 그 치료사를 원망하는 마음마저 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었고 그때는 "자폐는 아닐 거예요"라는 말에 안도해서 다른 곳을 찾아가야지 하는 생각도 못한 건 사실이다.


18개월부터 약 6개월 정도 다니면서 선생님은 나와 남편의 놀이태도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했다. 지시적인 태도와 가르치려는 자세가 문제고 아이와의 놀이는 아이의 행동을 모방해서 함께 어울려주고 아이와 눈 맞추고 기다려주라는 등... 많은 피드백을 받았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나는 너무 게을렀고 반응이 잘 돌아오지 않는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에는 더 재미있는 다른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25개월경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시간이 맞지 않게 되어 놀이치료센터는 그만두게 되었다.

나는 새로운 시작을 꿈꾸기 시작했고 여름쯤에는 지원사업에 도전해서 사업을 확장하려는 계획이 생겼다. 바쁘게 지원서를 작성했고 서류전형에 합격하고 교육을 받고 지원결정이 나서 기쁨에 취해 있었을 때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아이가 규칙을 잘 따르지 않고 문제행동을 하므로 집에서 지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네네, 집에서도 잘 이야기할게요.


그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남편은 병원에서 뇌동맥류를 발견해서 시급히 치료를 하게 되었다. 서울의 병원을 함께 오가며 진료받고 시술받고 남편은 요양하고 나는 지원사업을 진행하느라 정신없는 통에 어린이집 첫 학기 담임선생님이 개인사정으로 그만두시고 새로운 담임선생님이 전화를 주시기 시작했다. 규칙을 못 지켜요, 기다리는 게 어려워요, 집에서도 지도해 주세요. 네네, 알겠습니다. 집에 돌아온 아이에게 신신당부하는 날들. 아이는 서울을 오가는 우리 사정으로 그사이 친정에 맡겨져 있었고 나는 나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친정엄마는 친정엄마대로 모두 여유가 없었다. 스트레스로 터져나가려는 차에 단톡방에 어린이집 원장선생님의 메시지가 왔다. "어머님 내년도 저희 어린이집을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정말로 변경하시면 안 됩니다. 어린이집 옮기신다면 오늘까지 꼭 말씀해 주세요." 내 손은 나도 모르게 메시지를 적고 있었다. "저 다른 데로 옮길게요."


친구의 추천으로 다른 어린이집으로 결정하고 나서도 수료하는 2월까지 이전 어린이집을 보내야 하니 껄끄럽지만 계속해서 원장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을 마주쳐야 했다. 수료하는 날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장문의 사과문자를 보냈다. 자기가 잘 소통해야 한다는 의욕으로 어머님에게 오해를 산 것 같다고 심지어 그만두기로 결정한 이후 아이가 자신과 적응하고 나서 너무 잘 지냈고 수업에도 잘 참여하고 규칙도 잘 지켜주어서 나에게 스트레스를 준 것을 후회한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아이는 이전 어린이집이 너무 좋았다고 새로운 곳으로 옮기고 나서도 종종 말해서 내 속을 후벼 팠다. 내가 섣부르게 결정해서 아이에게 좋은 환경이었던 곳을 내가 억지로 옮기게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원사업으로 나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고 아이는 다른 어린이집을 다니게 되었다. 6월 즈음 어린이집에서는 통합반을 마련하려고 하는데 반에 두 명이 이미 발달지연이나 장애로 진단받아 진단서가 있는데 우리 아이도 진단서를 받아와서 함께 통합반에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담임선생님이 그만두시려고 하는 걸 붙잡아 두었고 새로운 통합반 선생님이 오시면 그분이 셋을 잘 돌보아 주실 거라면서. 이 얘기를 하니 남편과 친정엄마는 멀쩡한 아이를 장애인 취급한다고 펄펄 뛰었다. 그런데 엄마인 내가 제일 잘 안다. 우리 애 어딘가 이상해.


근데 장애 진단 그건 어디서 어떻게 받는 건데요? 원장선생님도 모르고 담임선생님도 모르고 인터넷도 모르고... 나는 주변에 물어물어 영유아 검진을 하고 진료 소견을 받아 전문의 의사 선생님 뵙고 검사하고 진단서를 받았다. 주민센터에 진단서를 제출하고 보육료 조건을 변경하고 나라에서 치료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고 해서 대기명단에 이름을 적었다. 근처 치료센터를 물어물어 찾아보고 실비보험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곳에 등록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센터도 데리고 다니게 되었다. 스스로에게 대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관련한 사람들 아무도 모르던 일을 스스로 알아내어 해결한 나 자신에게. 이제는 그 센터도 다른 곳으로 옮기고 횟수도 좀 줄인 상태이다. 어쨌든 공무원이 되지 못한 것은 다행이다. 9급 공무원의 급여로는 우리 삶을 지탱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근무시간 때문에 아이의 스케줄에 맞춰서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지도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아무런 이벤트 없이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다른 사람들이 내 삶을 이해할까? 남편은 이 모든 결정의 순간들과 예약, 진료, 센터 등의 방문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직장생활을 하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모두 참여할 수 없는 게 당연하기는 하다. 그러면서 나도 남편이 너무 부러웠다. 나도 내 일에 남편만큼 시간을 투자할 수 있다면 더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을 텐데. 아이를 돌보는 일은 해도 하나도 티도 안 나고 아이 발달이 늦은 것에 대해서도 엄마는 그저 비난을 받는 위치인 것만 같았다. 나는 나로 살고 싶었고 내 발전이 정말 행복한 사람이었는데 아무도 내가 포기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당연하게 남편은 자신의 삶을 살고 있었고 내가 남편이 도와줄 수 없어 힘든 하루에 대해 불평이라도 할라치면 일 때문에 그런 걸 자기를 비난하지 말라며 가시를 세웠다. 그러면서 멀쩡한 아이를 내가 예민하게 굴어서 장애아로 만들어 센터를 보낸다는 식의 비난으로 끝나는 말다툼들로 우리의 관계는 정말 최악으로 치달았다. 오늘 눈을 감으면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아니 사실 이 모든 일들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세상살이가 왜 이리 힘들지?


어떤 날은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해본다. 지금의 내 삶은 내가 원해왔던 것들이 모두 이루어진 꿈의 현실버전이다. 사랑을 너무 원했던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간절히 원했던 나는 아이를 얻어서 키우고 있으며,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해서 사업체를 운영 중이다. 나는 아이와의 행복했던 한 순간을 찍어 프로필 사진으로 해 놓았고 내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 중 어떤 이는 간절히 아이를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삶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갖고 살고 그것이 가져올 고통, 시련에는 일부러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겠지. 그래야 기대하는 마음으로 내일을 살아갈 에너지가 나올 것이 아닌가?


우울한 기분으로 버티는 삶을 사는 나에게 요즘 알고리즘은 감사하는 삶을 살라며 관련 콘텐츠를 계속 띄워 준다. 감사일기를 적으면 좋다나 뭐라나.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감사일기 시작해야지. 오늘 아름다운 바깥 풍경을 보면서 노트북으로 브런치 글을 마무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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