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서양의 기사, 일본 막부시대의 사무라이는 검으로써 분쟁이 종말을 맞이하는 칼의 시대 주인공이다. 칼의 사회에서 주인공은 무사이며, 펜의 사회에서 주인공은 학자, 선비이다. 우리 역사에서 고려시대까지는 칼의 시대, 조선시대부터가 펜의 시대라 할 만하다.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중국과의 조공 질서를 내면화하고, 사대주의를 신성불가침 한 것으로 여기게 되면서 우리 역사에서 무사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펜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우리는 지금 약 오백 년 전부터 시작된 펜의 시대 한복판에 살고 있는 것이다.
검의 시대와 펜의 시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검의 시대에는 개인 간의 다툼이든, 권력집단 간의 암투이든, 국가 간의 분쟁이든 모든 것은 결국 칼로써 승부가 가려진다. 칼로 하는 승부에서는 적을 베든지, 적에게 베이든지 양단간에 결론이 명확하게 나온다. 너도 이기고 나도 이긴다든지, 애매하게 중간에서 적당히 얼버무리고 타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무사의 시대에는 상대에게 함부로 대거리하고 시비 걸고 모함하고 비난하는 짓은 금물이다.
상대가 칼로써 승부를 요구하는 순간 목숨을 건 한 판 승부가 펼쳐질 수 있고, 공연히 소중한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참화를 불러올 수 있다. 칼의 사회에서 매너, 예의는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상대에 대한 존중, 공포의 균형이 은연중에 깔려 있다. 마치 핵보유국들이 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핵사용을 억제하는 상황과 유사한 것이다. 조선사회에서 예의가 주자학적 세계관, 철학에 따른 절차나 프로토콜이었다면, 일본, 서양에서의 예절은 근본적으로는 공포의 균형에 의한 것이다.
펜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흑백보다는 회색지대가 많고 승부도 불분명하고 혀를 날름거리는 뱀처럼 교활하고 사악하게 진실과 거짓을 비틀고 정의를 불의와 뒤섞고 종래에는 스스로 모순되고 억지스러워도 지치고 않고 끝까지 앵무새처럼 무한 반복하면 승리자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 펜의 사회다. 펜으로써 자신만의 정의를 구축하고 모래성 같은 진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펜의 사회다.
패거리를 만들고 언론을 장악하고 진실, 정의, 상식을 능욕하여 마침내 전 국민을 가스 라이팅 할 수 있는 것이 펜의 사회다. 말에 대한 책임, 거짓에 대한 무자비한 응징이 없는 펜의 사회는 사기꾼과 음모, 공작이 난무하는 정글이 되어갈 뿐이다. 사기, 무고, 명예훼손 송사가 난무하고 솜방망이 처벌이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에서는 진정한 펜의 사회를 이루기 어렵다. 거짓말과 속임수에 대해 무자비할 정도로 응징하여 신뢰가 지켜지지 않으면 현대 민주주의 사회는 불가능하다.
숨 쉬는 것 빼고는 입만 열면 거짓말인 정치인, 시민단체, 정당에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청문회 무대에 선 장관, 의정활동을 하는 국회의원이 바로 드러날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해도 드러나면 재수 없는 것이고, 이슈화가 되지 않고 그냥 넘어가면 별 탈이 없어서야 신뢰 형성은 불가능하다. 칼의 시대보다는 펜의 시대가 문명사적으로 더욱 진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펜의 사회에서 기승을 부리는 거짓, 음모, 공작은 문명의 진보가 아니라 칼을 내려놓고 어쩌다 맞은 펜의 시대에 나타나는 부작용이다.
우리 역사에서 펜의 시대는 중국과의 대적을 포기하고 속국으로 무릎을 꿇고 자주국방, 북방 개척을 포기하면서 시작되었다. 펜의 시대는 우리 스스로의 결단과 문명의 진보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검 대신 펜을 잡고 하는 새로운 양상의 투쟁이 시작되었고, 거짓, 음모, 공작은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거짓말, 속임수가 일상과 뒤섞여서 모두가 무감각하게 되어가고, 이제는 인터넷과 맞물려 가짜 뉴스, 댓글과 뒤범벅이 되어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헷갈리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 사회가 점차 천박한 펜의 사회가 되어가는 것은 조선시대 성리학적 세계관, 이데올로기가 무너지면서 체면, 명분을 모두 벗어던져 버리고 적나라하게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진영논리, 승자독식의 펜의 사회에서 등 뒤에서 총을 쏘는 비열한 짓이 오로지 적을 넘어뜨리고, 보스에게 충성하기 위하여 아무런 거리낌 없이 횡행하고 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막상 자신의 이권이 걸리면 뒷골목 양아치보다 못한 짓을 서슴없이 자행한다.
조폭, 한량, 깡패, 건달, 양아치 모두 들 등쳐먹고사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나마 의리가 있으면 한량, 건달이고, 오로지 이익만을 위해 배신을 밥먹듯이 하면 양아치라고 해서 구분한다. 칼의 시대에서 펜의 시대로 나아간 문명사적 진보를 진정으로 누리려면, 거짓, 음모, 사기, 협잡, 공작에 대해 끝까지 추적하고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