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안데르센 세계명작 - 엄지공주
첫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초보 엄마들에게 모든 아기들은 다 엄지공주, 엄지왕자 입니다.
그 작은 엄지들이 엄마의 사랑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서, 더 이상 작고 약한 엄지가 아니고, 세상을 향해 달려 나갈 준비가 된, 훌쩍 커버린 엄지들이 되어도 엄마들의 눈에는 아직도 작고 약한 '아기 엄지' 로만 보입니다.
부모는 이 세상 살아가는 게 힘들고 험하다는 걸 경험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부모의 보살핌 아래에서 어려움 없이 자라게 하는 게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라 믿고 아이들에게 끝없이 사랑을 쏟아붓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아기가 아닌 '엄지' 들은 그 험한 세상 밖으로 하루빨리 나가고 싶어 하고,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만나고 싶기에 부모의 사랑을 무거워하고 벗어버리려 발버둥 칩니다. 아이들이 때가 되면 독립해서
나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때'가 언제인지는 부모와 자식 간에 항상 의견 차이가 있다 보니 부모
자식 간에도 사랑과 전쟁은 늘 함께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엄지공주' 이야기를 생각하며, '사랑'이라는 이름표를 단 '부모의 간섭'에 힘들어하는 사춘기 아이들도
생각했고, 집 떠나서 이런저런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씩씩하게 '독립생활'을 꾸려나가는 사회초년생들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엄지가 집을 떠나서 만나는 세상이 결코 친절하지 않고, 낯설고 어려움이 많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현실을 잘 받아들이며 스스로의 선택으로 한발 한발 나아가며 성장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저에게도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가서 홀로 서서 길을 만들어야 할 아이들이 있기에, 우리 아이들도 엄지처럼 잘 성장하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엄마!! 엄마는 내가 무슨 말은 하는지 아는 거야 아님 모르는 거야?"
"알아"
"아니, 엄마는 모르는 거 같아, 그러니까 자꾸 이러지"
엄지는 날이 선 목소리로 엄마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고 있어 엄마는 엄지의 호두껍질 침대에 따듯한 솜을 깔아주고 싶어서 말려놓은 목화꽃
한송이를 가져와서 솜을 뜯어내고 있었다.
"엄마, 이건 내 침대야, 내가 필요하면 내가 솜을 가져다가 쓸 거고, 나도 솜 정도는 뜯을 수 있어"
"알아, 그래도 엄마가 미리 해주려고 했지"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엄마가 미리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어"
"알았어, 미안해..."
엄마는 손질하던 목화꽃을 엄지의 침대 옆에 놓아두고 화가 난 엄지를 피해서 밖으로 나왔다.
엄지는 엄마와 지내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엄지의 영역으로 엄마가 들어오는걸 극도로 싫어했다.
하지만 엄마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엄지에 대한 사랑도 크고 깊어지면서 엄지에게 해주고 싶은 것도
많아지고, 위험한 세상으로부터 엄지를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도 더 커져만 갔다.
엄마에게 엄지는 너무 작고 너무 약해서 엄지를 위해서 모든 걸 엄마가 해주고 싶었고, 엄지가 눈에 안 보이면 도무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적한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정원을 가꾸며 살고 있던 엄마는 아이를 간절히 원했지만 오랫동안 아이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농사를 지으며 땅에게도 빌고, 꽃에게도 빌고, 눈이 내리면 눈 내리는 하늘에, 비가 내리면 비 오는 하늘에, 그리고 지나가는 바람에게도 아기를 갖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던 어느 화창한 아침, 정원의 꽃에 물을 주다가 튤립 꽃 안에서 자고 있던 엄지를 발견했다.
꽃에 물을 주자, 튤립이 활짝 열리면서, 그 안에서 아주 작은 아이가 기지개를 켜며 잠에서 깨어났다.
너무 놀라고 기쁜 엄마는 작은아이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 안녕, 잘 잤니? 만나서 너무 기쁘구나. 너를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단다 “
아이는 웃음으로 대답하며 엄마와 눈을 맞추었습니다. 작은 아이는 정말 엄지손가락 반보다도 작은 크기여서 엄마는 아이의 이름을 ‘엄지’라고 부르기로 하고 다시 한번 아이에게 말을 했습니다.
“ 나는 ‘엄마’라고 해, 너의 이름은 ‘엄지’라고 하자, 환영한다 엄지야”
엄마는 엄지를 위해 호두껍질로 침대도 만들어주고, 테이블 위에 물그릇을 올려놓아 엄지가 꽃잎을 타고 놀면서 지낼 수 있도록 놀이터도 만들어 주었다. 작은 엄지는 호두껍질 침대 안에서 편안한 잠을 잤고, 물그릇에
띄어놓은 튤립 잎에 앉아서 떠다니며 예쁜 목소리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엄마는 그런 엄지를 보면 하루의 피로가 다 날아가버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한 감정과 기쁨이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마구 솟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엄마는 늘 엄지를 볼 때마다 속삭였다 “내게 와주어서 너무 고맙다 엄지야, 우리 오래오래 함께 행복하게 잘 살자.” 엄지도 엄마 없이는 살 수 없을 만큼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았고, 엄마의 큰 그늘 아래에서 무서울 것 없이 안전하게 지내는 게 좋았다. 하지만, 하루 종일 집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계속되자 엄지는 창밖 세상을 궁금해했고 밖에 나가서 혼자 살아가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꽃에 둘러싸여 혼자 하는 뱃놀이도 지루하고, 들어주는 사람 없는 노래도 힘이 없어질 즈음, 창밖에서 힘찬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지나가던 제비가 엄지의 힘없는 노랫소리에 답을 하며 날아와 창밖 나뭇가지에 앉았다. “좋은 목소리를 갖고 왜 그리 슬프게 노래를 하지?” 제비가 물었다.
“밖에 나가고 싶어"
"나가면 되지"
"엄마가 절대 혼자 외출을 못하게 해.”
“엄마가 너를 너무 사랑하니까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럴 거야”
“알아, 하지만 나는 세상 밖이 너무 궁금하고, 나도 이제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세상을 볼 수 있는데, 엄마는 절대 혼자서는 못 나간다고 해”
그렇게 바깥세상을 궁금해하는 엄지를 위해 제비는 세상 밖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추운 겨울이 되면 따듯한 남쪽나라로 여행을 떠났다가 따듯한 봄이 오면 다시 마을로 돌아오는 제비는 많은 곳을 여행하며 살았기 때문에 엄지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정말 많았다.
매일 집안에서 혼자 지내던 엄지에게 제비는, 바깥세상을 볼 수 있는 창문이었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낙엽이 지면서, 제비도 이제 다시 따듯한 남쪽 나라로 가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제비와 헤어지기 싫은 엄지는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며 제비를 잡았지만, 날씨가 점점 더
추워져서 제비는 내년 봄에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남쪽으로 가는 마지만 친구들을 따라서 떠나버렸다. 다시 혼자가 된 엄지는 예전처럼 하루 종일 집에서 혼자 지냈다. 엄마가 함께 나가자고 가끔 물었지만, 엄마 주머니에만 있어야 하는 외출은 엄지에게는 집에 있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어서 외출도 즐겁지가 않았다.
어느 화창한 날, 그날도 엄지는 엄마의 작은 앞치마 주머니에 담겨 엄마와 함께 정원으로 나갔다.
정원일에 지친 엄마가 벤치에 앉아 잠시 졸고 있을 때, 엄지는 쉽게 앞치마 주머니에서 혼자 나올 수 있었다.
벤치 아래 땅으로 내려오니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보였다.
엄지 보다도 작은 개미들이 작은 나뭇잎 조각들을 하나씩 들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줄지어 가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엄지도 나뭇잎을 하나 들고 같이 따라가 보았다. 그러다가 땅속 집으로 들어가는 개미들을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어서, 엄마에게 돌아가려고 돌아보니, 잠에서 깬 엄마가 엄지가 없어진 걸 알고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었다. 엄지는 엄마에게 달려가서 괜찮다고 소리 질렀지만 너무 놀란 엄마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엄지는 옆에 있던 클로버 잎을 따서 양손으로 흔들면서 엄마를 부르자 그때서야 엄지를 발견하고 엄마는 자리에 주저앉아 더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이후 엄지는 다시는 혼자서는 절대 아무 데도 갈 생각을 못했고, 엄마의 보호는 점점 더 심해졌다.
오늘도 엄마는 문단속을 단단히 하고 일하러 나가고 엄지는 호두껍질 침대에 누워서, 제비가 이야기해준 세상 밖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언제쯤 제비가 돌아와서 또 새로운 이야기를 해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낯선 발자국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물기가 마르지 않아 축축한 얼굴을 한 두꺼비가 엄지를 내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 놀라지 마 엄지야, 나는 너를 잘 알아, 네가 이 집에 첨 왔을 때부터 너를 보고 있었어”
그러면서 제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제비가 세상 이야기를 해줄 때 나도 탁자 밑에서 항상 듣고 있었어.” 엄지가 경계심을 조금 풀고 물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 왜 왔지?”
“제비가 이야기해주었던 세상 밖으로 한번 나가지 않을래? 너는 저 작은 물그릇에서만 놀았지만 밖에 나가면 끝이 안 보이는 물이 있고, 네가 타고 놀던 꽃잎과는 비교도 안되게 멋진 '연잎'이라는 배가 수도 없이 물 위에 떠있어, 보고 싶지 않아? “
순간 엄지는 제비에게 늘 말로만 듣던 세상을 직접 볼 수 있다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두꺼비의 등에 올라탔다. 엄마 생각이 잠깐 스치듯이 났지만, 잠깐 구경만 하고 다시 돌아오면 되겠지 하는 마음에 곧 엄마 생각은 날아가 버리고, 곧 눈앞에 펼쳐질 세상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마루 아래 구멍을 통해 빠져나와서 두꺼비와 함께 달려간 곳은 정말 물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고, 물 위에는 크고 작은 연잎들이 둥둥 떠있고 그위에는 또 크고 작은 연꽃들이 여기저기 뿌려져 있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풍경에 넋을 잃고 있는데 두꺼비는 엄지를 연잎에 내려놓고 어디론가 급히 달려갔다, 잠시 후, 좀 더 작은 크기의 두꺼비가 엄지 곁에 와서는 ”너구나… 우리 아빠가 데려온 아이가” 영문을 몰라하는 엄지에게 작은 두꺼비가 계속 이야기했다.
“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나 따라오면 어떻게 해, 내가 일도 안 하고 매일 여기를 떠날 생각만 하니까 아빠가 내 신붓감을 구해온다고 하고, 너를 데려온 거야. 하지만 나는 곧 여길 떠날 거야, 나는 더 넓은 세상에 나가 살아볼 거야, 그러니까 너도 빨리 알아서 네 갈길 찾아서 가” 엄지는 너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라 우두커니 연잎 위에 앉아있으니, 작은 두꺼비가 와서 다시 이야기를 했다.
"다음부터는 정말 아무나 그렇게 믿지 마, 누구도 너를 아무 대가 없이 도와주지 않을 거야.
무슨 선택을 하던 너 스스로 생각하고 네가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을 해. 나는 내 친구 물고기들에게 부탁을 해서 물속에서 이 연잎의 줄기를 잘라 이 강 아래로 흘러가도록 할 거야, 너는 어떻게 할래? 이 연잎을 타고 갈래 아니면 여기서 너 가고 싶은데로 갈래? 네가 결정해.”
연잎 아래서는 물고기들이 이미 줄기를 자르기 시작했고, 엄지는 우선 연잎을 타고 가겠다고 했다. 그러자마자 연잎은 줄기에서 떨어져 물살과 함께 떠내려 가기 시작했다. 연잎이 큰 바위 근처를 막 돌아갈 때 작은 두꺼비는 팔짝 뛰어내리며 엄지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난 여기서 내린다, 잘 살기 바래, 안녕.”
혼자가 된 엄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그저 물이 흐르는 데로 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큰 날개를 가진 나비가 엄지의 연잎에 와서 내려앉았다.
“안녕?” 반가운 마음에 엄지가 인사를 건네었으나 나비는 슬쩍 한번 쳐다볼 뿐 대답이 없다.
“너는 어디로 가니? 혹시 나랑 같이 가면 안될까? “ 엄지가 물었으나 나비는 역시 싸늘하게 대답한다.
“내가 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따라오는 거야 네 자유지만, 내가 데리고 가진 않을 거야” 하면서 나비는 그 큰 날개를 가볍게 저으며 머리 위로 날아 올라갔다. 엄지는 물에 떠내려오는 나뭇가지를 하나 얼른 잡아서 노를 저어가며 나비를 따라갔다. 나비가 방향을 바꿔 숲으로 날아가는 걸 보고 엄지가 급한 마음에 물로 뛰어들어 헤엄치면서 강기슭으로 가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붕붕 하는 커다란 소리가 나면서 엄지의 몸이 갑자기 하늘로 붕 떠올랐다.
깜짝 놀란 엄지가 위를 보니, 커다란 풍뎅이가 엄지를 여섯 개의 다리로 감싸 안고 날아가고 있었다.
“안녕, 귀염둥이. 걱정 마 내가 너를 구했어”
풍뎅이는 활짝 웃는 얼굴로 엄지를 보면서 계속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너는 누구야? 어디로 날아가고 있는 거지?” 겁에 질려 엄지가 소리쳤다.
“걱정 마, 내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갈 거야, 너도 그곳을 좋아할 거야 우리 동네는 …"
풍뎅이는 쉬지 않고 떠들었고 엄지가 하는 말을 하나도 듣지 않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내며 시끄러운 날개소리와 함께 날아가고 있었다.
풍뎅이는 엄지를 나뭇잎이 무성하고 나뭇가지도 많은 어느 나무 위에 내려놓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나와 다르게 생긴 친구를 만나고 싶었어, 너를 보는 순간 내가 오래전부터 찾고 있던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고, 네가 물에 빠져서 떠내려 가길래 바로 구해준 거야, 바로 내가.”
“하지만 나는 떠내려가고 있는 게 아니라 수영하고 있었던 거야”
“상관없어, 어쨌든 내가 너를 구한 거야.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내 친구 가족들도 모두 너를 좋아할 거야,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
풍뎅이가 쉴 새 없이 떠드는 동안에 풍뎅이의 가족과 친구들이 붕붕 날개소리를 내면서 하나둘 모여들었다. 풍뎅이는 의기양양해서 자기가 엄지를 구해준 이야기를 떠벌리며 엄지와 함께 오래오래 살 거라고 들떠서 떠들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큰 풍뎅이가 엄지를 여기저기 뜯어보더니 불만에 찬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근데 너는 날개도 없이 어떻게 우리랑 살겠다는 거지? 거기에 다리도 두 개밖에 없으면 나무에는 어떻게 기어오르고, 몸은 왜 이리 빼빼 말라있고, 머리는 왜 이모양이야…”
쉴 새 없이 엄지에 대한 단점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다른 풍뎅이들도 거기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맞아 맞아… 저 다리로는 나무에 붙어있지도 못해”
“날지도 못하니 늘 우리에게 빌붙어서 신세만 지려고 할 거야”
급기야 엄지를 데려온 풍뎅이에게 불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형편없는 애를 좋아한다고 하고 우리에게 데려온 거야?”
모든 풍뎅이들이 엄지에게 등을 돌리고 험담을 하며 엄지를 데려온 풍뎅이에게 대답을 요구하자
엄지를 데려오며 확신에 들떴던 얼굴은 금세 피곤함으로 바뀌어 버렸고, 다른 풍뎅이들과의 갈등을 원치 않던 말 많은 풍뎅이는 방향을 급선회하며 다른 풍뎅이들과 합세하고 말았다.
“뭐 사실 내가 그 정도로 좋아했던 건 아니야, 너희들이 내겐 더 중요한 가족이지…”
그러면서 풍뎅이는 엄지에게, 함께 살 수 없을 거 같으니 이제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하며 엄지를 땅에 내려놓고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가 버렸다.
땅 위에 갑자기 혼자 남겨진 엄지는 주변이 너무 낯설고 조금 두려웠지만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풀숲에서 먹을 수 있는 열매들을 찾아서 따먹고, 이슬이 달려있는 잎을 찾아서 목도 축여가며 저녁 잠자리를 준비했다. 잠시 집 생각이 났지만, 너무 피곤해서 금방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엄지는 본격적인 '숲생활'을 위해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생각하고 그때부터 쉴 새 없이 일을 하기 시작했다. 새들이나 큰 곤충들을 피해서 다녀야 하기 때문에 조심해서 돌아다녀야 했고, 어느 날엔 한나절 동안이나 작은 짐승을 피해 숨어있다 보니 그날은 하루 종일 굶고 물도 마시지 못했다. 숲에서 살아가는 생활은 너무 고되고 바쁜 날의 연속이었지만,
엄지는 숲이 익숙해지면서 맛있는 열매도 잘 찾고, 안전한 잠자리도 잘 만들 수 있었으며, 귀여운 개미 친구들도 많이 사귀면서 숲 생활에 잘 적응하게 되었다.
하지만 날씨가 하루하루 더 추워지기 시작하면서 숲에서는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시들어버린 나뭇잎에는 더 이상 이슬도 맺히지 않아 물 한 모금 찾아마시는 것도 힘들게 되었다. 집을 나올 때 입었던 옷은 다 헤지고 낡아서 추운 밤공기를 막아주지 못했다. 어제부터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먹을걸 찾아 헤매던 엄지는 땅에서 옥수수알 한 개를 발견했다. 그리고 몇 걸음 앞에 또 옥수수 한 알, 그 앞에 또 한 알… 옥수수알을 주우며 따라가다 보니 엄지 앞에 작은 문이 나타났다. 엄지의 치마 안에는 엄지가 걸어오면서 주워 모는 옥수수알이 수북이 쌓여있었고 그때 문이 열리며 작은 들쥐 할머니가 나왔다.
엄지는 치마 속 옥수수를 보여주며 오면서 주웠다고 말하자 들쥐 할머니는 엄지가 건네주는 옥수수알을 받고는 엄지를 집에 들어오게 했다. 들쥐 할머니의 집은 좋은 냄새가 나면서 아늑하고 따듯했다. 할머니는 엄지에게 따듯한 음식과 깨끗한 옷을 내어주며, 갈 곳이 없으면 이번 겨울은 할머니의 집에서 지내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함께 지내기 위해서는, 집 청소도 하고 할머니도 돌봐주어야 했고 말동무가 돼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주어야 했다. 엄지가 약속대로 집안일도 열심히 하고, 할머니도 잘 돌봐주며 지내자 할머니도 엄지를 가족처럼 아끼고 위해주게 되었다.
할머니의 집에는 매주 한 번씩 손님이 왔는데, 땅속 깊은 곳에 살고 있는 두더지가 일주일에 한 번씩 맛있는 음식을 가져와서 할머니와 함께 저녁을 먹고 돌아갔다. 두더지는 항상 부드럽고 따듯한 벨벳 코트를 멋지게 차려입고 다녔으며 집안 창고마다 곡식들을 가득 채워놓고 살고 있었다. 그렇게 부자에다 친절하기까지 한 두더지가 엄지를 좋아하자, 할머니는 둘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며 엄지에게 늘 두더지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엄지는 할머니와 두더지에게 지금은 결혼할 생각이 없고 앞으로 더 넓은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이 많다고 이야기했지만,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할머니는 계속해서 두더지와의 결혼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두더지는 엄지가 자신의 으리으리한 집을 보면 마음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자신의 집으로 엄지와 할머니를 초대했다. 두더지는 땅속 깊이 빛이 들어오지 않는 굴에 살기 때문에 엄지와 할머니는 등불을 밝히며 앞장서서 걷는 두더지를 따라 굴로 들어가고 있었다. 굴 입구로 몇 걸음 들어가자, 굴 안쪽에 새 한 마리가 죽은 듯 움직이지 않고 바닥에 누워 있는 게 보였다. 두더지는 힐끗 쳐다보고 지나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쯧쯧 … 남쪽으로 가지 못한 제비가 또 이렇게 죽었네, 미리미리 갔어야지, 게으름 피우다 늦게 떠나니까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저렇게 얼어 죽지 …”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제비를 지나쳐서 집으로 들어갔다. 엄지는 제비를 지나치다가 잠깐 멈춰서 살펴보았다. 날개가 꺾여있었고 눈은 감겨있었지만, 심장이 약하게나마 들썩이고 있었다. 두더지와 할머니의 재촉에 엄지는 더 이상 제비를 살펴보지 못하고 두더지의 집으로 들어가 저녁을 함께했다. 두더지는 자신의 집을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각종 곡식으로 가득 찬 창고며, 부드러운 벨벳으로 만든 옷으로 가득 찬 옷장, 크고 화려한 가구들… 할머니는 두더지의 자랑에 계속 맞장구를 쳐주며 딴생각에 빠져있는 엄지에게 연신 두더지의 칭찬을 했다. 저녁 먹는 내내 제비 생각을 지울 수 없던 엄지는, 저녁식사 후 빵 몇 조각을 손수건에 싸서 나오면서 굴 입구에 누워있는 제비에게 달려갔다.
빵을 잘게 잘라서 입안에 몇 조각 넣어주고, 나머지는 그 옆에 놓고 집으로 왔다.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제비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들었고, 아침이 되자 물을 가지고 다시 동굴로 갔다. 입안에 빵도 없어졌고 옆에 놓아두었던 빵 조각도 다 먹은 것 같았다. 입에 물을 조금 넣어주니, 심장이 좀 더 들썩이고 다리도 조금씩 움직이는 게 보였다. 집으로 돌아와 따듯한 이불을 가지고 가서 덮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제비가 감겨있던 눈을 조금씩 뜨며 정신을 차리고, 이내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엄지?” 제비가 곁에 있던 엄지를 알아보고 이름을 불렀다.
역시 엄지의 친구 제비가 맞았다. 엄지는 처음 제비를 보고 친구를 떠올렸으나 그 친구는 이미 남쪽으로
날아갔다고 생각해서 엄지의 친구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혹시 몰라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는데, 제비가 엄지를 알아본 것이다. 엄지는 너무 기뻐 눈물을 흘리며 제비를 안아주었다.
엄지는 제비에게, 제비는 엄지에게 왜 여기 있는지를 물었고, 엄지는 두꺼비를 따라서 집을 나온 이후의 이야기를 제비에게 모두 들려주었다. 제비는 마지막으로 떠나는 친구들과 함께 남쪽으로 날아갔지만, 너무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그만 눈보라를 만났고, 더 이상 남쪽으로 가지 못하고 되돌아오다 날개를 다쳐 이 굴에 떨어지게 되었다고 했다. 엄지는 매일매일 굴에 와서 제비를 돌봐주고 제비와 함께 밀린 이야기도 하며 함께 긴 겨울을 보냈다. 엄지의 보살핌 덕분에 꺾어진 날개가 다 회복된 제비가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을 즈음 긴 겨울이 지나고 굴 밖에는 새 봄이 돌아왔다. 제비는 엄지에게 그동안 들려주었던 넓은 세상으로 함께 떠나자고 했지만 엄지는 몸이 쇠약해진 들쥐 할머니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 제비는 매일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고 엄지는 매일 하늘을 보며 더 넓은 세상은 어떨지 상상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어느 날, 들쥐 할머니는 그런 엄지를 불러서 이야기했다.
"엄지야, 이 세상은 겨울이 지나면 이렇게 봄이 오듯이, 꽃도 피면 지고 누구나 다 늙어가면서 이 세상과 작별한단다. 나는 세상과 작별할 준비가 되었고 너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준비가 되었으니 이제 엄지가 살고 싶은 세상으로 나가렴." 엄지는 겨울을 함께 보낸 들쥐 할머니를 꼭 안아주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할머니를 찾아온 두더지에게도 작별 인사를 한 뒤 제비와 함께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제비는 들판과 물 위를 한참 날아다니며 그동안 엄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아름다운 풍경들 속으로 엄지를 데리고 가서 구경시켜 주었다. 하늘에서 보이는 모든 것들은 엄지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신기한 풍경들이었다. 한참을 날며 여행을 마친 제비와 엄지는 높은 나뭇가지 위에 있는 한 제비 둥지에 내려앉았다. 둘이 둥지에 도착하자 다른 가지에 있는 제비둥지에서 여러 제비들이 나와서 엄지와 제비를 맞이하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제비는 엄지에게 말했다 "엄지야, 우리는 예전처럼 다시 좋은 친구가 되어서 자주 만날 수 있지만, 이 제비둥지는 엄지가 살기에는 너무 높고 위험해. 나무 아래에 있는 꽃밭에 엄지 친구들이 많으니 그곳으로 가보자" 제비를 따라 나무를 내려오는데 제비둥지 아래쪽에 말 많은 풍뎅이가 친구들과 함께 떠들다가 엄지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안녕, 귀염둥이” “안녕 못난이”
엄지도 인사를 했다. " 안녕, 시끄러운 풍뎅이"
꽃밭에는 튤립 꽃들이 가득하고 엄지가 내려오자 꽃송이마다 엄지와 같은 작은 사람들이 하나씩 나와서 엄지를 환영하며 반기었다. 엄지가 친구들과 인사하며 꽃과 꽃 사이를 뛰어다니다 보니 저 멀리, 꽃밭 끝에 작은 시냇물이 보이고, 그 시냇물 위에 작은 다리, 다리 건너편에 너무도 낯익은 집이 보였다.
엄지와 엄마가 살던 집이었다. 집 밖에는 보고 싶던 엄마가 오늘도 정원에 나와서 꽃들을 가꾸고 있었다.
엄지는 꽃밭을 지나 작은 다리를 향해 힘껏 달려갔다. 작은 다리 아래에는 두꺼비 부자가 연잎 위에 앉아서 다투고 있다가 엄지를 발견하고 아들 두꺼비가 인사를 건넨다.
“안녕 엄지, 또 새로운 세계로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내려와 “
두꺼비에게 웃어주고, 다리를 가로질러 뛰어가는데 갑자기 엄지의 몸이 풍선처럼 점점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다리를 건너 엄마의 정원에 들어가며 엄마를 불렀다.
“엄마”
장미를 가꾸던 엄마가 돌아보다 엄지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서 주저앉았다.
“엄지야… 언제 왔니... 또 언제 이렇게 컸니?”
엄지는 이제 엄마보다 더 커져 있었다.
엄지가 반가움에 울고 있는 엄마를 꼭 안아주며 이야기했다.
"엄마, 집 밖은 엄마 말데로 너무 춥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었어. 나는 이제 더 멀리 갈 수도 있어"
엄마보다 한참 커진 엄지의 품에서 엄마도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야기했다.
"엄마에게 이야기해주어서 고마워, 엄지가 어떤 선택을 하던 엄마는 계속 엄지를 믿을 거야"
엄지와 엄마의 머리 위로 큰 날개를 가진 나비와 아름다운 노래를 하는 제비가 날아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