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편이지만, 술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는 주량이 워낙 미약하여
거의 모든 술들을 한두 잔 그저 맛보는 수준으로 즐기며 살고 있다.
막걸리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 맛과 향의 조합이 너무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첫 잔을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면 입안 가득히 퍼지는 곡주 특유의 친근한 술향과
혀를 자극하지 않는 부드럽고 친절한 맛이 좋아서 잠깐이라도 입에 머금었다가 목으로 넘긴다.
이 또한 한두 잔이 내 한계이기 때문에 되도록 천천히 맛과 향을 즐기며 마시곤 하는데
항상 이 친근한 술향이 버릇처럼 나의 어릴 적 기억도 함께 데리고 온다.
막걸리 향이 친근해지게 된 이유...
깊고 깊은 두메산골에서 살다가 도시로 시집을 오신 나의 엄마는 여러 가지 손가는 음식들을 많이 만드셨다.
아버지 생신이나 명절에는 꼭 집에서 술을 빚어서 손님들을 대접하고, 또 손님들 돌아가실 때 술병 하나씩을 함께 들려 보내셨다. 외가 친척들도 오시면 집에서 담근 술을 드시면서 이번에도 잘됐다, 향이 좋다 하시며즐기시기에 특별한 날 며칠 전부터 술 빚는 일이 당연한 순서가 되었다.
그 시절은 집에서 담그는 술을 '밀주' 라 부르며 불법으로 단속하던 때라서
엄마는 항상 부엌 한 구석에서 누가 볼세라 어두운 밤에만 술을 담그는 일을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남의 집 부엌에서 일어나는 일을 누가 알며 또 누가 안다 한들 이웃 간에 그런 일을
신고까지 할까 싶지만 심심치 않게 어느 동네에 누가 술 담그다 잡혀갔다는 풍문인지 뜬소문 인지
모를 말들이 돌아다니던 시절이라 엄마는 숨길 수 있는 만큼 꽁꽁 숨어서 술을 담그셨다.
그러면서 엄마는 술이 잘 익으면 이웃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면서 연신 입으로만 쉿! 을 하고
동네 아주머니들 모아서 쉬쉬 하면서 술 담그는 방법도 알려주시고 장독대 에는 술 담글 때만
사용하는 폭이 좁고 긴 '술독' 이 항상 있으니 우리 집은 누가 봐도 술 담그는 집이었다.
엄마가 술을 빚기 시작하면, 어느 날부터 집안에 뭔가가 쉰 듯하면서도 쿰쿰한 술 익는 냄새가
둥둥 떠다니기 시작하고, 엄마는 집안일 틈틈이 술독을 들여다보며 정성스레 살피는 게 일과가 되었다.
3살 위 개구쟁이 오빠와 나는 술독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해서, 엄마가 수시로 살피는 그 술독이
너무 궁금했지만, 비교적 말을 잘 듣던 우리 남매는 그 술독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다.
시간이 지나 술이 잘 익고, 그 탁한 술을 고운 체에 거르고 나면 '술지게미'가 많이 나오는데
술 거르는 날에는 동네 할머니들이 오셔서 술지게미에 설탕을 타서 함께 나누어 드셨다.
할머니들이 얼마나 맛나게 드시던지 어린 마음에 너무 먹고 싶어서 상 주위만 뱅뱅 돌았지만,
애들은 먹는 게 아니라며, 엄마가 숟가락조차 안주어서 너무너무 서운했지만... 비교적 말 잘 듣는
어린이였던 나는 서운함을 다 표현 못한 채 상 주위만 맴돌았었다.
당신들이 드시는 걸 먹고 싶어서 주위를 맴도는 어린아이를 무시할 수 있는 할머니들이 얼마나 될까?
할머들이 나도 한수저, 너도 한수저 하면서 돌아가면서 한수저씩 주시는 걸 받아먹었는데 그 맛이,
그동안 먹었던 음식들과는 다른 감칠맛 이 있었다. 푹 끓인 눌은밥과 비슷한 모양과 식감이었는데
입안에 퍼지는 술향은 술 담글 때마다 집에서 떠다니던 냄새였으니 낯설지 않은 향기였고, 설탕을
타서 술맛보다는 달달함이 먼저 느껴지는 이 술지게미는 아무 저항감 없이 술술 넘어가는 그런 맛이었다.
눌은밥 보다 백배는 더 맛있어서 나를 단번에 사로잡았던 술지게미.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주시던 할머니들에게 술지게미를 한두 수저 받아먹었던 기억은 있는데
정신 차리고 보면 어느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자고 있었다. ^^
미취학 어린이 시절부터 술지게미 맛을 저 정도로 느끼며 좋아했다면 그 이후 대단한 술꾼으로
자랐을 만도 하지만, 그 어린이는 알코올 분해 효소가 거의 없는 어른으로 자라서 좋아하는 술을 앞에 두고
하도 천천히 마시다 보니, 늘 제사 지내냐는 핀잔을 듣고 사는 어른이 되었다.
가끔 막걸리에 어울리는 음식을 만들었거나, 한인마켓에 갔다가 막걸리를 보게 되면 한 병씩
사 오긴 하는데 이곳에 수출되는 한국 막걸리들의 맛은 너무 달고 농도가 탁하다.
몇 해 전부터 수제 전통주 만드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강습하는 곳도 많이 생겨서 집에서 직접 전통주를
만드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난 듯하다.
지난번 한국 여행 갔을 때 전통주 강습을 받고 싶었지만 일정이 너무 짧아서 배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집에서 달고 맛없는 막걸리를 마시다가 옛날 우리 집 막걸리 생각이 나서 바다 건너 계신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엄마의 막걸리 만들기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여전히 옛날 사람이신 엄마는 예전에 엄마가 하셨던 술 담그는 방법을 차근차근 이야기해주셨는데
첫 번째 고개부터 넘기가 쉽지 않다.
우선 술은, 통이 좁고 위아래가 긴 옹기 항아리 '술독'에 담그어야 된다 고 하신다.
그 술독에 맞는 크기의, 술 거르는데 쓰는, '용수'라는 바구니와 맑은술을 거르는 고운 '체'도 필요하고
누룩은 꼭 집에서 만든 것이 발효도 잘되고 술맛도 좋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준비할게 한두 개가 아니다.
엄마의 설명을 다 듣고 내린 결론은,
엄마처럼 술 빚는 것은...
엄마의 막걸리를 재현 하는것은 불가능하니
길을 좀 돌아가기로 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았다.
요즘은 전통주의 유행에 따라 크고 작은 모임의
전통주 동호회도 많이 있고 지방마다 특색 있는
전통주 만드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곳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다.
이 지긋지긋한 코로나로부터 좀 자유로와 지면
한국으로 날아가서 엄마의 막걸리 이야기도 좀 더
자세히 듣고, 내가 만들고 싶은 나만의 막걸리도
만들어 보고, 내가 모르던 다른 향기로운 우리 술들도 맛보고 하는 시간이 빨리 올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