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입시 강사다.
많은 사람들이 강의는 ‘지식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공교육의 역할이다.
사교육 강사인 내가 하는 일은 조금 다르다.
나는 아이들이 무엇을 모르는지 찾아내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방해가 되는 돌멩이를 하나씩 치워주는 일.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엔 관심이 없다.
문제를 풀고 나면 가장 먼저 묻는다.
“선생님, 이거 맞아요?”
맞았는지 틀렸는지, 그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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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건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시대 자체가 ‘틀림’을 견디지 못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를 ‘액체 근대’라 불렀다.
모든 것이 빠르게 흐르고,
붙잡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시대.
흐름이 너무 빠르다 보니,
사람들은 고정된 무언가—즉 ‘정답’—을 붙잡아야 마음이 놓인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끝없이 바뀌는 진도 속에서
“지금 이 문제의 정답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배움의 과정보다
지금 ‘맞고 있다’는 감정이 더 중요해진다.
한병철은 이런 시대를 ‘피로사회’라 불렀다.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고,
잠깐의 쉼마저도 ‘자기 계발’로 포장되는 사회.
우리는 불안을 없애기 위해 성과를 쌓고,
성과로 다시 자신을 증명한다.
결국 불안은 시대의 통화가 되었고,
우리는 확실성으로 결제한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건
무엇을 모르는지가 아니라,
몇 점을 받았는가, 내가 틀리지 않았는가 다.
정답만 있으면 불안은 잠시 사라지니까.
그런데 말이다.
나는 늘 아이들에게 말한다.
“정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왜 그 답에 도달했는지를 봐야 한다”라고.
하지만 정작 나 역시 똑같은 인간이었다.
어제 깍두기를 담겠다고 재료를 다 사놨는데
막상 뉴슈가가 없는 거다.
엄마는 늘 뉴슈가와 소금으로 무를 절이셨다.
새벽이라 엄마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그냥 설탕으로 절이면 되지 않나?’ 싶어 유튜브를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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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담그는 법.’
그런데 다들 뉴슈가로 절이고 있었다.
‘뉴슈가 대신 설탕 써도 된다’는 말은 없다.
그래서 검색어를 바꿨다.
‘뉴슈가 없이 깍두기.’
그랬더니 바로 영상이 떴다.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닌데
이미 다 해결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영상이 너무 길었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영상을 봐서,
마치 깍두기를 백 번쯤 담근 사람처럼 피곤했다.
그때 깨달았다.
이래서 에세이가 안 팔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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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과정을 견디지 못한다.
유튜브도, 책도, 강의도, 다 마찬가지다.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그래서 결론이 뭐예요?”
이 한마디만 남는다.
가을 무의 효능이니, 고르는 법이니, 절이는 과정이니—
그건 어쩌면 내가 몰랐던 유익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미 피로한 하루의 끝에 있다.
그냥 이렇게 외치고 싶은 거다.
“아 몰라요, 그냥 설탕 쓰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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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다.
불안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본능이다.
모르는 상태를 오래 두는 건 고통스럽다.
그래서 우리는 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즉각적인 ‘확신’을 찾아 나선다.
바우만이 말한 액체 근대의 인간처럼,
붙잡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확실한 답 하나’는
마치 세상 마지막 남은 부동산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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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에세이는 팔리지 않는다.
에세이는 정답이 아니라 풀이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르는 채로 견디는 법,
틀린 채로 살아내는 법을 보여준다.
하지만 현대인은 이미 너무 피곤하다.
에세이를 읽을 체력이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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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나는 결국 깍두기를 담았다.
소금도, 뉴슈가도 없이,
“절이지 말라”는 어느 주부의 조언에 따라.
그리고 여전히 모른다.
뉴슈가와 설탕의 차이를.
다음번에도 아마 똑같이 검색하겠지.
‘뉴슈가 대신 설탕 써도 되나요?’
내가 모르는 걸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 근본적인 차이를 끝내 알지 못하느냐고 묻는다면,
그저 이렇게 말할 거다.
주마간산도 너무 보다 보니,
이젠 안 가봐도 피곤하거든요.
하지만 언젠가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내게 남은 유일한 방법은
유튜브를 끝까지 시청하는 것-인 것처럼
우리는 결국 에세이를 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