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A가 최근 이별했다.
A는 그 과정이나 사유에 대해 길게 말하지 않았다.
얼핏 보면 그녀에게서 이별의 징후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잘 웃고, 잘 먹으며, 어제와 같은 일상을 살았다.
다만 이십 년을 지켜봐 온 친구들 입장에서는 조금 달랐다.
우린 그녀가 그와 어디서 뭘 먹었는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시시콜콜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들이 어떻게 연애했는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
존재가 아닌 부재로써.
익숙한 거리를 걷다 문득 말을 잊고,
좋아하던 뮤지컬 얘기에도 애매한 표정을 짓고,
늘 가던 일본음식점에선 더 이상 우리를 만나지 않았다.
그녀의 평범한 일상에서 완전히 도려내진 그 부분—
바로 그곳이 오랜 연애가 자리했던 지점이었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에,
그의 그림자는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소멸이 아니라, 흔적의 지속으로.
사라졌지만 남아 있는 것들, 그것이야말로 존재의 가장 완고한 방식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완전히 지웠다고 믿는 순간조차,
이미 그 흔적의 언어로 자신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소한 말투와 취향, 표정 하나하나에
누군가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이미 끝난 사랑이 아직 말하고 있는 방식으로.
A가 삼겹살을 초고추장에 찍어 먹던 아이였던가.
말끝마다 일본어를 섞어 쓰는 애였던가.
날씨를 설명할 때 별자리로 말하는 건,
누가 가르쳐준 걸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여전히 타인의 언어로 자신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타인을 통과하며 자신이 되고,
나를 설명하는 문장엔 언제나 타인의 흔적이 깃든다던
주디스 버틀러의 말을 증명한 셈이다.
내가 나를 말할 때조차도 이미 누군가의 언어를 빌린 고백이라니!
술에 취한 어느 날,
그녀는 내게 물었다.
“언제쯤 예전의 나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글쎄,
6년의 사랑이 일상이었던 그 시절에서
사랑의 일상을 빼고 나면, 대체 무엇이 남을까.
그렇게 남은 너는 정말 예전의 너일까?
하지만 난 말했다.
“금방. 곧.”
그가 통과하느라 찢어져 아픈 상처는
어쩌면 금방, 곧, 아마도 씻은 듯이 낫긴 할 테니까.
다만 흉터인 흔적만은 이제 그녀 자신이 될 테지만.
그러니, 지금 나를 통과하거나
우회하고 계신 손님 여러분—
엉망진창 정리되지 않은 길이라 미안합니다.
그러나 종착역까지, 부디 안녕하시길.
내 안에 남겨질,
당신이 통과했거나 우회했다는 그 흔적들 또한
죽는 날까지 안전히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