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내가 수능 칠 때,
평소처럼 자주 가던 절에도 안 가고, 그 흔한 찹쌀떡 하나 사 오지 않았다.
수험생 있는 집집마다 고3이 벼슬이라며
수험생 눈치 때문에 못살겠다는 하소연이 쏟아졌지만,
우리 집은 아니었다.
엄마는 특별히 내 눈치를 보지 않았다.
밤늦게도 티비를 보며 깔깔거렸고,
주말이면 이웃들을 초대해 밥을 먹었다.
근데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엄마의 일을 하고, 나는 나의 일을 하는 것이.
그렇다고 수험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어서 그렇게 태평했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이 정확히 얼마만큼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서로 비교해 볼 수는 없었지만,
나 역시 두렵고 무서웠다.
아니, 절박했다.
특히 나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사실 엄마는 내가 대학에 진학하길 원하지 않았다.
홀몸으로 날 키우던 엄마는 내심,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취업을 해서 돈을 벌어왔으면 하는 바람을 비추곤 했다.
그 시절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해서도 은행에 취업하고,
이름은 들어봤을 기업들에 경리로 들어가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게 미담으로 퍼지던 때였다.
생각해 보면, 딱히 큰 꿈이 있어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중3 때 담임선생님이 “아깝다.”라고 했던 말에
처음으로 내가 ‘아까운 존재’ 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기뻐서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는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고등학교 원서를 쓰기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중학교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오래 상담을 했다.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엄마에게도, 선생님에게도 듣지 못했다.
다만 엄마가 학교에 다녀간 후,
담임선생님과 좀 더 자주 눈이 마주쳤고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 나갔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길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최초의 입시였던 고등학교 진학 연합고사를 칠 때까지
엄마는 딱히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 역시 괜히 밤늦게까지 불 켜놓고 공부하는 척
유난을 떨어본 적이 없었다.
실제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기도 했고.
그래도 연합고사 날이 다가올수록
일찍 잠들진 못했다.
그럴 때면 엄마가 아파서 끙끙 앓는 소리를
오래도록 들으며 누워있었다.
시험날 아침, 엄마는 나보다 먼저 일어나
식탁 위에 만 원을 두고 장사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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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분위기에 떠밀려
0교시부터 10교시,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까지 해가며
학교를 다니다 보니 어느새 고3이 되었다.
더러 수업료를 못 내 칠판에 이름이 적히기도 했고,
자주 가난에 대해 원망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건
내가 ‘아까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한 사람의 기대 때문이었지만,
그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치러야 했던 비용은
온전히 엄마 혼자만의 몫이었다.
난 공부를 하다가도
장사를 마치고 피로에 지친 엄마가 돌아오면 서둘러 불을 껐고,
엄마가 밤새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 미안해서 숨을 죽였다.
그렇다고 생존에 직면해 살았던 우리가
살가운 모녀 사이도 아니었다.
그래서 빈말도 못했다.
‘엄마가 고생이 많다.’
‘내가 잘 돼서 다 갚아드릴게요.’
그런 말을 할 뻔뻔함이 나에겐 없었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빈말로라도 “공부하느라 고생 많다.”
“좋은 대학 가서 엄마 고생 잊지 말라.”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린 이미 서로에게 미안한 게 너무 많았다.
각개전투였다.
엄마는 젊은 나이에 이혼을 하고
나를 혼자 키우기로 했던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나는 이런 형편에서도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서로의 선택에 조그만 기대나 바람을 얹을 여유도 없었다.
그저 각자의 책임을 다하기에도 벅찼다.
그렇게, 아무도 이야기한 적 없었지만
나는 이게 마지막 기회란 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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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능 당일 아침,
그런 나조차도 조금 당황한 일이 벌어졌다.
엄마가 뜨겁게 펄펄 끓는 죽을 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장사에 나가지 않고 내 도시락을 싸고 있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그 도시락 메뉴가 죽이었다는 건 더 놀라웠다.
마침 부산에 일이 있어 우리 집에 내려와 있던 큰 이모는
엄마가 끓이던 죽이 내 수능 도시락이라는 걸 알고는 펄쩍 뛰었다.
“누가 시험날 죽을 싸주냐! 불길하게!”
이모는 새로 도시락을 싸자며 법석을 피웠고,
엄마와 작은 실랑이를 벌였다.
그때 나는 문득 TV를 봤다.
시험운을 좋게 해 준다는 명산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가고자 하는 대학 입구엔 엿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부럽고, 고까워서.
TV 속 그들은 맘껏 ‘바라고’ 있었다.
자식이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기를.
그 기대와 바람에 걸맞은 정성의 값을 치르며.
그때 엄마가 법석을 피우던 이모에게 말했다.
“쟤가 위가 안 좋아서 체할까 봐 끓였다.
넌 이런 딸 안 둬서 이런 내 맘 모른다.”
그 말은 변명 같기도, 원망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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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날 미역국을 먹지 않고, 죽을 쑤지 않는다거나
찹쌀떡이나 엿을 먹는 행위는 각자의 기대와 불안을 다루는 방식이다.
하지만 우리 모녀에게는
그런 기대도, 불안도 나눌 여유가 없었다.
죽은 그냥 죽일 뿐이었다.
지극히 실질적인 음식으로서의 죽.
나는 그냥 그 도시락을 들고 나왔다.
시간이 촉박하기도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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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수험장에 들어섰고,
2교시까지는 생애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되자 완전히 지쳐버렸다.
머리는 멍했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험 성적으로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이—
그리고 그런 내 삶의 비용을 대느라 허리가 끊어지던
엄마의 삶마저도 점수가 매겨진다고?
밤마다 끙끙 앓던 엄마의 통증이,
가난에 목이 메던 내 슬픔이,
고작 선택지 1, 2, 3, 4, 5를 잘 고르는 것만으로 갚아진다고?
억울했고, 북받쳐 올랐다.
분한 마음에 입술을 짓 깨물며 책상 위 도시락을 노려봤다.
펄펄 끓는 죽만 들어 있는 줄 알았더니,
마를 갈아 참기름을 뿌려 놓은 작은 통도 있었다.
마가 위장에 좋으니까,
아마도 죽 먹기 전에 먹으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엄마는 진짜,
내가 위경련이라도 일어날까 봐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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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문득, 집 나서기 직전 도시락을 내게 건네며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들을 땐 아무 감흥이 없었던 그 말.
“너무 긴장하지 마라.
인생이 이것밖에 답이 없는 것 같아도 막상 살아보면 그렇지도 않더라.
벽도 문이라고, 막막하면 벽도 밀어보고—
그러다 보면 없던 길도 생기고 그래.
혹여 실수했다고 거기에만 매달리지 말고,
할 만해서 했겠지 싶으면 맘 편히 먹어라.
그러고도 마음이 힘들면,
엄마가 시험날 죽 싸줘서 그랬다고 내 탓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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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터졌다.
태연한 척했지만 너무 두려웠다.
본 걸 다시 보고, 풀었던 문제를 다시 풀어봐도 무서웠다.
불안했다. 모든 게 엉망이 될 것 같았다.
아무도 내 지난 시간을 알지 못하면서
결과로만 내 노력을 평가할 것 같았다.
‘너 같은 건 해봐야 별수 없지 않으냐’
세상이 비웃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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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터진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난 꺽꺽 소리를 내며 울면서도 죽통을 열었다.
수능 한파 속에 얼어붙은 나와 달리
죽통 안에서는 아직도 펄펄 김이 올라왔다.
씹을 것도 없이 잘게 다져진 표고버섯이 보였다.
여느 어미들처럼 엿이나 찹쌀떡을 내밀며
자식의 합격을 빌던 그 흔한 기대조차,
행여 내게 짐이 될까 미안했던 엄마가
그 모든 기대를 잘게 다져 죽을 끓였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우린 각자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각개전투를 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아니었다.
엄마는 그 모든 순간에도
내가 짊어져야 할 내 선택의 책임마저
당신의 등 뒤로 숨기고 있었다.
“내 탓해라.”
내가 도망갈 구석을 남겨주고 싶었던 말.
내 실패까지도 기꺼이 당신의 몫으로 가져가겠다는,
엄마가 할 수 있었던 가장 현실적이고 절박한 사랑의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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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통을 껴안고 꺼이꺼이 울던 나를 보고
다른 반에서 건너오던 친구가 기겁을 했다.
“야, 왜? 망쳤어? 괜찮아.
야, 시험 존나 어려웠어. 다 못 봤을 거야.”
울상이 된 친구는 나를 달래다가
내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결국 저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우린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긴장과 설움을
그렇게 한바탕 울음으로 쏟아내고,
서로의 꼴을 보며 깔깔 웃었다.
서럽고, 억울하고, 고맙고, 그리고 웃겼다.
참, 울고불고 지랄난 나다운 수능날이었다.
세상엔 이런 사랑도,
이런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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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서 말인데요, 어머님들.
수능엔 뜨끈하고 소화 잘 되는 죽이 최곱니다.
여러 의미에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