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새벽 6시, 어둠의 정적을 깨는 짧은 진동음이 울렸다.
암막 커튼 사이로 빛 한 줄기 새어 들지 않는 완벽한 어둠 속.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벗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폭설로 인해 오늘 회사 문을 닫습니다."
다시 확인한 날씨 정보창에는 온종일 강설 경보가 떠 있었다. 체감온도는 영하 22도.
이번 주 내내 납빛으로 가득했던 하늘이 지루했는지, 오늘은 세상에 하얀 눈을 뿌려주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휴가.
어젯밤 내내 잠자리를 뒤척이느라 예민해져 있던 마음이 '여유롭게 쉴 수 있다'는 안도감에 가벼워졌다.
주방으로 향해 어제 사 온 식빵 한 장을 꺼냈다. 노란 버터를 듬뿍 바르고 치즈 한 장을 툭 얹어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그사이 카푸치노를 내리기 위해 커피 머신을 돌렸다. '드르륵, 드르륵.' 고요한 거실을 채우는 커피빈 가는 소리가 오늘따라 요란하면서도 정겹다. 신기하게도 오늘에서야 바닐라 커피빈의 향기가 이토록 좋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출근 전쟁을 치러야 했던 평소의 아침엔, 바쁘다는 핑계로 이 향기조차 온전히 누릴 여유가 없었다.
따뜻한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거실 커튼을 활짝 걷어보았다. 창밖에는 하얀 눈송이들이 춤추듯 흩날리고 있다. 베란다 난간에 도톰하게 내려앉은 눈의 높이를 보니, 내가 잠든 사이 밤새 얼마나 눈이 내렸을지 짐작이 간다.
창밖으로 쉼 없이 쏟아지는 하얀 눈은 그 어떤 소란도 피우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소음을 하얀 솜이불로 덮어버린 듯한 이 정적이, 나는 참 좋았다.
만약 이런 날 평소처럼 출근을 해야 했다면, 나는 이 아름다운 눈을 향해 짜증부터 냈을지도 모른다. 소리 없이 쌓이는 눈은 보기엔 더없이 우아할지 몰라도, 그 길을 뚫고 가야 하는 출퇴근길은 누군가에게 지옥이나 다름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오늘은 문득 깨닫는다. 창밖의 지독한 추위를 애써 견디지 않아도 되는, 예기치 않게 찾아온 이 고요한 하루.
캐나다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설레고도 아늑한 풍경이라는 것을. 세상은 온통 하얀 정적 속에 잠겼다.
오늘 폭설이 선물해 준 이 고요함 속에 머물며, 미처 몰랐던 커피의 향기를 천천히 음미했다.
뉴스를 확인해 보니 아이들의 학교도, 스쿨버스도 모두 멈춰 섰다. 어쩐지 창밖으로 지나가는 차 한 대 보이지 않더라니. 세상이 이토록 조용했던 이유가 있었다.
캐나다의 이런 체계적인 시스템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진다. 눈이 많이 오면 무리해서 일터로, 학교로 향하라고 등을 떠미는 대신 "위험하니 오늘은 멈추라"라고 말해주는 체제. 효율이나 성과보다 사람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이 단호하면서도 다정한 배려가 좋다.
이런 시스템 안에서 우리는 멈추는 법을 배운다. 폭설은 단순히 교통을 마비시킨 재해라기보다, 앞만 보고 달리던 우리에게 잠시 숨을 고르라고 세상이 강제로 걸어 잠근 '안전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문득, 한국의 겨울의 모습들을 떠올려 본다. 한국에서의 눈은 늘 치열한 극복의 대상이었다. 발목까지 차오른 눈 속에서도 "어떻게든 출근하는 것"이 성실함의 증거였다. 그 촘촘한 성실함의 굴레 속에서 멈춤은 곧 뒤처짐을 의미했다. 눈이 내리는 풍경조차 내일 아침의 빙판길 걱정에 가려지던, 조금은 가혹했던 계절.
나를 채근하던 한국식 성실함을 잠시 내려두고 이곳의 느긋한 순응을 닮아보기로 한다. 사람을 향한 이 고요한 배려 덕분에, 지옥 같은 출근길 대신 바닐라 향 가득한 방 안에서 잠깐의 휴식을 얻었다. 눈은 여전히 소리 없이 내리고, 이 고요한 평화 속에 머물기로 했다. 텅 빈 도로 위로 소리 없이 쌓이는 눈송이들은,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를 다독여주는 듯하다.
책을 읽다 문득 창밖을 보니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읽던 책[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을 덮고 카메라를 챙겨 집 밖으로 나섰다.
발을 들이밀 때마다 푹푹 빠지는 눈길을 밟으며, 매서운 눈발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셔터를 누르는 두 손이 그새 빨개졌다. 차가운 두 손을 주머니 속에 밀어 넣을 틈도 없이 나는 눈 쌓인 풍경을 담아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늘 그랬다. 영하 20도를 밑도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눈이 오는 날이면 홀린 듯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사실 눈 오는 풍경은 늘 비슷하다.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그 단순한 이치는 매번 다르지 않다. 하지만 매번 달랐던 건 그 풍경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었다. 똑같은 시선 끝에 걸린 풍경이라 해도,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 그 온도는 완전히 달랐으니까.
오늘은 예기치 못한 휴가 덕분인지, 조금 들뜬 기분으로 렌즈 너머 세상을 본다. 20센티미터가 넘게 쌓인 눈길 위에 홀로 서 있는 이 묘한 기분은, 마치 달콤한 코코아 한 잔을 마시는 듯한 따뜻함으로 다가왔다.
예상치 못한 하루의 쉼표 덕분에 쌓였던 피곤함이 씻겨 내려간다. 매일이 흐렸던 날씨처럼 무거웠던 몸도,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힌 하얀 눈 덕분에 가벼워진 듯하다.
E.S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