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과 감성의 글을 쓰고 싶어요
제46회 신춘문예 시상식장으로 향하는 길.
올겨울 들어 가장 매서운 추위가 세상을 꽁꽁 얼려버린 날이었다. 간밤에 도착한 축하 메시지와, 추운 날씨지만 꼭 참석해 주길 바란다는 관계자의 다정한 이메일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온기를 지펴주었다.
오랜만에 신발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구두를 꺼내 신었다. 평소에는 세미재킷을 입어도 늘 편안한 운동화를 신었다. 큰 키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쇼핑 리스트에서 구두는 자취를 감췄다.
내 신발장엔 구두 대신 운동화가 색깔과 기분 별로 줄을 서 있다. 보라색과 분홍색의 화사함부터, 디자인과 브랜드가 제각각인 검은색과 회색, 흰색과 조화롭게 배색된 은색, 그리고 강렬한 빨강과 검정이 섞인 운동화까지. 내 발을 감싸는 건 언제나 지면의 충격을 흡수해 주는 푹신한 고무 밑창이었다. 한국에서 사 온 검정 구두와 금색 리본이 달린 갈색 구두가 나의 마지막 구두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 편안함을 잠시 밀어두기로 했다.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구두를 신고 길을 나선다.
'또각, 또각.'
얼어붙은 보도블록 위로 경쾌한 구두 소리가 울려 퍼진다. 평소의 묵직한 발걸음과는 다른, 조금은 날카롭고도 선명한 소리. 그 소리는 마치 잊고 지냈던 어떤 설렘을 깨우는 듯했다.
추위에 어깨가 움츠러들 법도 한데, 발끝에서 시작된 기분 좋은 긴장감이 몸을 곧게 세우게 한다. 운동화의 편안함이 일상을 견디는 힘이라면, 오늘 신은 구두의 불편함은 특별한 순간을 예우하는 나의 방식이다.
행사장 입구에 들어서자 [제46회 신춘문예 시상식, 캐나다문인협회]라는 현수막이 가장 먼저 나를 반겼다.
그곳엔 나이가 지긋한 문단의 어르신들이 많이 계셨다. 낯선 이방인 같은 나를 보자마자 어르신들은 내 손을 따뜻하게 맞잡아 주셨다. "수진씨 맞죠? 글 정말 잘 읽었어요! 사진작가라면서요?"
예상치 못한 환대와 칭찬에 나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니에요, 작가까지는 아니고요. 그저 사진 찍는 걸 좋아할 뿐입니다. 고맙습니다!"
식장 안으로 발을 드리니, 공간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클래식 연주가 흐르고 있었다. 한쪽에는 조촐하지만 정갈한 다과가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익숙한 팀홀튼 커피 한 잔을 잔 가득 채워 들고, 순서지가 놓인 의자에 가만히 자리를 잡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혹독한 겨울 날씨 속에서도 문학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바이올린 켜는 소리, 기타 선율 위에 얹어진 노래,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준비했을 문인협회 분들의 정성이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렸다.
영하의 추위를 뚫고 온 이들을 위해 음악회를 열고, 정성스레 다과를 준비한 그 따뜻한 마음들. 순간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아까 마신 커피보다, 이 공간을 감도는 사람들의 온기가 내 몸을 더 뜨겁게 데워주는 듯했다.
이 나라에서 글을 쓴다는 것, 그리고 그 글을 누군가와 나눈다는 것은 어쩌면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일인지도 모른다.
식장 안을 가득 채운 백발의 문인들을 바라보며 문득 숙연해졌다. 나보다 먼저 이 척박한 땅에 도착해 뿌리를 내리고,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애써온 시간들.
캐나다 신춘문예의 역사는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 동안 '신춘문예'라는 이름으로 신인 작가를 발굴해 온, 명실상부한 이민 문학의 심장부다. 한국에서 건너온 기성 작가들과 이곳에서 새로이 꽃을 피운 이들이 모여 만든 이 단체는, 고단한 이민 생활 속에서도 '작가'라는 이름을 부여하며 한인 사회의 문학적 자긍심을 지탱해 왔다.
현재 활동하는 중견 작가의 80% 이상을 배출해 낸 권위 있는 등용문. 매년 발행되는 동인지 [캐나다 문학]의 두께만큼이나 그 뿌리는 깊고 단단하다. 이제 곧 창립 50주년을 바라보는 그 찬란한 계보 속에, 나의 이름 석 자가 수줍게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잠시 후, 정적을 깨고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심사위원님들의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한 심사평이 이어졌다. 드디어 수필 부문 심사위원님이 마이크를 잡으셨다. 나의 글이 세상 밖으로 다시 한번 호명되는 순간이었다.
심사위원님은 내 글을 향해 이렇게 평하셨다.
입상작 수진님의 글은 자연의 계절 속에서 사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추억을 소환하는 매개체로 작용합니다. 화자는 자연과 삶을 따듯하게 연계하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글 속의 표현은 시각과 청각뿐 아니라 후각과 촉각까지 움직이지요. 글 속에서 오감을 느끼게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그 표현들을 보고 글을 오래 써온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그뿐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과 멈춰 선 시간을 대비하며 사진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 것으로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사진 속의 순간은 이야기가 되고 또 다른 삶의 기록이 된다는 문장의 여운이 깁니다. 다음 글이 기다려집니다.
사실, 나는 이 상이 내게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글쓰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여전히 '어떻게 써야 하나'를 막막하게 고민하는 사람일 뿐이니까.
나는 글 쓰는 법을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고, 문학 언저리의 분야에서 일을 해본 적도 없다. 그저 나는 논리보다 감각이 앞서고,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가는 디자이너일 뿐이다.
심사위원님은 내가 글 속에 담아내려 했던 미세한 감각들을, 내가 세상을 바라보며 느꼈던 그 특유의 결을 정확하게 짚어내어 읽어주셨다.
'아, 내 진심이 닿았구나.'
나의 사소한 감각들을 누군가 알아봐 주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순간,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 눈물은 기쁨이라기보다 안도감에 가까웠다. 기술이 없어도, 배운 것이 부족해도, 오직 마음 하나로 쓴 글이 누군가의 가슴에 가닿을 수 있다는 그 경이로운 사실이 나를 울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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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저 캐나다의 찰나를 사진 속에 담고, 그 빛의 조각들을 글로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카메라 렌즈로 포착한 세상이 나의 감각과 감성을 대변해 줄 것이라 믿었다.
기술도, 경험도 부족한 나의 글 속에서 가능성을 발견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작가’라는 이름이 아직은 낯설고 수줍지만, 내 안의 감각을 믿고 멈추지 말라는 그 격려를 잊지 않고 글을 써 내려가겠다.
S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