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미스터리(3)

덴무 덴노(천황)의 설계와 봉인된 백제의 코드

by 목인

덴무(天武)는 일본의 제40대 천황이다. 일본서기가 약 13만 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덴무에 대한 기록이 무려 2만 자에 달한다는 점은 그가 사실상 이 기록의 주인공임을 증명한다. 그는 672년 조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일본판 계유정난', ' 임신의 난' 통해 집권했다.


오아마(훗날 덴무)의 유년기는 백제라는 실체적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을 목격하는 시간이었다.

부친 조메이 왕은 '백제궁'과 '백제사'를 창건하며 열도의 중심을 백제에 두었다. 모친 사이메이 여왕은 660년 백제 멸망 후 직접 군대를 통솔해 지원을 강행하다 의문 속에 사망했다. 뒤를 이은 형, 덴지 역시 663년 백강전투에 4만 명의 대군을 투입했으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덴무는 부모와 형이 백제를 위해 국력을 전면 투사했음에도 구다라 백제는 멸망했으며, 그 결과로 민심은 동요하고 왕권이 뿌리째 흔들리는 참담한 현실을 목격했다.

당시 왜 조정은 소가 씨를 비롯한 백제계 도래 씨족들이 왜왕을 수시로 교체하거나 살해하며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덴무는 패전으로 인한 민심의 이탈과 귀족들의 전횡이라는 내우외환 속에 국가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했고, 왕권의 위신이 바닥에 떨어졌음을 인지했다. 임신의 난을 통해 집권한 덴무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전면 개편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국호를 '왜'에서 '일본(日本)'으로 바꾸고 수도를 이전했다. 또한 '천황'이라는 새로운 구심점을 세워 귀족과 관료들의 충성심을 고취시키고,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여 독자적인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국가 설계를 단행했다.


덴무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완성하기 위해 일본서기를 집필하며 국민 개조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3세기의 여왕 히미코(卑弥呼)는 반드시 삭제해야만 했다.

그녀의 야마타이국은 규슈 세력에 기반하고 있어, 천황가의 만세일계 정통성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히미코 이후 왜가 중국 기록에서 사라진 147년(266~413년)의 공백은 백제와 열도 사이의 특수한 관계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이 기간 왜는 신라를 지속적으로 공격했으나, 인접한 백제와는 단 한 번의 교전 기록도 없으며 대중국 외교 활동 또한 중단되었다. 덴무는 이 비이성적 침묵의 세월을 대체할 논리가 없자 히미코를 삭제하고, '신공왕후'라는 신화를 가공하여 그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5세기의 '왜 5 왕(찬·진·제·흥·무)' 역시 덴무가 지워야 할 역사였다. 중국 남조 기록에 등장하는 이들은 백제 왕실과 혈연적 유착 관계에 있었으며, 특히 왜 왕 '무(武)'는 백제 무령왕과 혈연적 연관성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덴무는 이들의 실명을 삭제하고 행적을 분산시켜 그들의 흔적을 지웠다.


그러나 덴무 본인부터가 백제의 유산이었으며, 그를 도운 신흥 귀족들 역시 백제의 혈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덴무 사후 나라가 다시 혼란에 빠진 것은 인위적인 페르소나가 오랜 동질성을 압도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덴무의 개혁은 백제를 지우려 했으나 그 뿌리 깊은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지만, 국호 일본과 천황제라는 외형을 남겨 오늘날까지 연결한 '절반의 성공'이었다.

우리는 덴무의 집권과 일본서기의 편찬 과정을 통해 히미코와 왜 5 왕이 사라진 미스터리를 추적했다. 1,300년 전 덴무가 시대적 생존을 위해 '가면'을 설계했다면, 그 미완의 기획이 남긴 실체적 정답은 현재 일본 궁내청 서릉부가 관리하는 천황릉과 봉인된 고문서 속에 잠들어 있을지 모른다. 역사는 찬란한 영광뿐만 아니라 껄끄러운 진실까지 마주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오늘날의 일본은 그 배경을 이해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진정한 용기를 보여야 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마주할 때, 비로소 덴무가 원했던 새로운 국가가 시작될 수 있음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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