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의 변신과 일본의 탄생
[비문의 행간]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을 자구(字句) 그대로 믿는 것은 역사적 미망에 빠지는 일이다. 백제가 본래 고구려의 속민이었다거나, 왜가 백제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 그리고 고구려의 5만 대군이 왜를 섬멸했다는 서사는 입체적인 증거가 전무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객관적 상황과도 괴리가 큰 고구려만의 '승전 서사'다.
장수왕은 부왕의 업적을 드높이기 위해 '왜'라는 세력을 서사의 주체로 끌어들였다. 이는 백제에 대한 의도적 멸시를 드러내는 동시에, 고구려를 동아시아 질서의 유일한 구원자로 설정하려는 화려한 정치적 수사였다. 따라서 우리는 비문의 글자 한 자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그 행간에 숨겨진 관계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왜(倭)의 정체성]
우리가 추적한 '왜'의 실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변모해 온 유동적 주체였다. 3세기부터 4세기 초반까지의 왜는 한반도 남부 해안에서 대마도를 거쳐 규슈 북부 해안에 산재한 '경계인'들이었다. 이들은 백제 근초고왕기(일본서기의 신공기)를 거치며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당시의 왜는 여전히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백제라는 거대한 구심점에 의존하고 있었다. 약 150여 년간 왜가 독자적인 외교 무대에 등장하지 않았던 점이 이를 증명한다.
이후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백제가 위기를 맞이하자, 아직기와 왕인으로 상징되는 백제의 선진 문물과 혈맥들이 본격적으로 열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마침내 세토 내해를 건너 동진하며 '야마토(大倭)'를 완성하게 된다. 이 시기까지 열도에 있어 백제는 여전히 모국(母國)이자 문명의 원천인 '구다라(大國)'였다. 그러나 660년 백제 멸망과 672년 임신의 난은 이 관계에 결정적인 변곡점을 가져왔다.
[일본(日本)의 탄생과 지워진 백제]
덴무 천황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일본'이라는 국호가 등장한다. 백제 패망과 백강전투의 패배로 인한 극도의 혼란 속에서, 새로운 구심점이 절실했던 그들은 만세일계의 천황제를 확립하며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국가 정체성에 방해가 되는 과거의 흔적들은 철저히 차단되었다. 그러나 혈맥 속에 흐르는 백제의 유전자까지 지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늘 이 순간에도 백제의 흔적은 그들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도도히 흐르고 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과거의 역사를 오늘의 국경선이라는 좁은 틀로 재단하는 것이다. 이제는 은폐된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 일본 궁내청 서릉부의 깊숙한 서고와 '성역'이라는 이름 아래 굳게 닫혀 있는 거대 고분들을 과감하게 개방해야 한다. 그 어둠 속에 갇힌 기록들이 세상의 빛을 볼 때, 비로소 동아시아 역사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질 것이다.
광개토대왕비 속의 왜를 추적하는 일은 고구려 승전보의 수사 뒤에 가려진 백제의 거대한 숨결을 복원하는 과정이자, 오늘날 일본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비문에 새겨진 '왜'라는 문자의 한계성에서 벗어나면, 경계인으로써 그들이 남긴 역사의 파동이 오늘날의 동아시아 속에서 여전히 박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연재로써 왜는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왜를 쓰는 것을 멈추지는 않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