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위기와 왜의 기이한 행동
1. 433년, 막다른 골목에서의 선택
427년 12월, 비유가 백제 제19대 왕위에 올랐으나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이었다. 내부적 갈등은 최고조였고, 고구려의 위협은 눈앞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더하여 왜조차 더 이상 근초고왕 때의 그 왜가 아니었다.
고구려 장수왕은 평양으로 도읍(427년)을 옮기고 남진 정책을 본격화한다. 이에 앞서 왜왕 찬(讚)은 413년 중국 동진에, 그리고 이후에도 남조(南朝)로 사신을 3차례 더 보내면서 조공을 한다. 그동안 국제무대에서 침묵하던 왜가 147년간의 긴 침묵을 깨고 독자적인 외교 활동을 재개하고 나선 것이다. 백제와 결별하고 독자 노선을 선언한 것이다. 백제는 위로는 고구려, 동쪽으로는 신라, 바다 건너 왜까지 완전히 고립무원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왜의 배신과 이탈이 가장 뼈아팠다.
힘을 보태도 부족할 왜가 동맹국 신라를 때리고 대외적으로는 백제를 비토 하며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한 것이다.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비유왕은 이 위기에서 탈출해야만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신라와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서기 433년, 백제와 신라는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나제동맹을 맺게 된다.
2. 반 백제 세력의 등장
백제와 왜의 관계를 보면 하나의 법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백제의 중앙권력이 강력할 때 왜의 독자적인 외교 활동은 없었다는 점이다. 백제가 고대국가로 발전하면서부터 왜의 외교활동은 보이지 않았다. 전성기 근초고왕 시기는 말할 것도 없고 훗날 무령왕의 중흥 시기에도 왜의 독자적인 외교 활동은 기록상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백제가 열도의 세력들을 자신들의 질서 안(담로)에 포용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백제의 힘이 빠지는 순간, 미스터리한 일탈이 시작된다. 이 일탈의 동력은 열도 내부의 복잡한 권력 지형 변화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론해 본다. 396년 수도 한성이 포위되고 아신왕이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자, 이에 불만과 위협을 느낀 세력들이 대거 열도로 이주했다.
이들은 백제의 최고 지식층으로서 백제 왕실에 대립적인 세력이었으며, 열도 내부의 반 백제 세력들과 결합했다. 백제가 강성할 때는 왕실 직계와 연결된 친 백제 세력이 주도권을 잡았으나, 백제의 국운이 기울자 이들 이주 유민들과 토착 호족 세력 그리고 기타 도래인 세력들이 합세해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백제에서 건너온 유민들의 존재는 열도 내부 반대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3. 왜 5 왕의 독자 외교
결국 5세기에 등장한 왜 5 왕의 독자 외교는 이러한 내부 주도권 다툼의 산물이다. 백제 중앙 정부의 권위가 흔들리는 틈을 타, 유민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은 왜의 새로운 실권자들은 중국 남조와 수교하며 백제의 외교적 위상을 깎아먹고 독자적인 지위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왜는 더 이상 전략적 파트너가 아니었으며, 내부 세력의 분열로 인해 오히려 통제 불능의 존재로 변모한 것이다. 백제는 이 분열된 열도의 목소리를 제어하고 흔들리지 않는 단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4. 왜(倭)로 간 곤지(昆支)
이 미스터리한 일탈을 잠시나마 잠재웠던 것은 개로왕이 보낸 곤지였다. 461년, 개로왕이 동생 곤지를 왜로 보낸 것은 한층 높아진 고구려의 위협 앞에서 백제 내부의 분열(17대 아신왕부터 20대 비유왕까지 모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과 왜 내부에서조차 목소리를 높이던 반대파의 기세를 꺾고, 다시 친 백제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고 백제 왕실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곤지가 왜에 머물던 16년 동안 왜의 대중국 외교 활동은 기록상에서 일시적으로 자취를 감춘다. 곤지는 열도의 분열된 목소리를 하나로 묶고, 왜를 다시 백제의 충실한 후방 기지로 되돌려 놓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475년 위례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죽으면서 백제가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곤지는 귀국하게 되었다. 그러자 동시에 왜 내부의 반대 세력들이 다시 고개를 들며 동맹국인 신라를 공격하는 등 독자적인 행동을 재개하기 시작한다.
이로써 왜는 혈연관계 등으로 형성된 친 백제세력과 백제 중앙 권력의 반대하면서
이주해 온 세력과 그리고 그들과 연합한 토착세력의 반 백제 세력으로 재편되었다.
5. 생존을 위한 선택과 균열
결국 5세기의 나제동맹과 왜의 기이한 행동은 백제 중심의 동북아 질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생존 투쟁의 결과였던 것이다.
백제는 고구려라는 거대한 위협에 맞서기 위해 숙적이었던 신라와 손을 잡는 파격적인 선택을 해야 했고, 동시에 통제권을 벗어나려는 왜를 붙잡기 위해 왕실의 핵심 인물인 곤지를 파견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그리고 곤지가 머문 16년 동안 왜의 독자 외교가 중단되었다. 이는 당시 왜가 백제의 세력권 아래에 있었지만 하나의 목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분화를 거듭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475년 한성의 함락은 이 위태로운 균형을 무너뜨렸다. 백제의 패망 위기는 곧 왜 내부의 반 백제 세력에게 명분을 제공했고, 이는 동맹국에 대한 공격과 외교적 이탈로 이어졌다. 나제동맹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는 방패가 되어주었으나, 바다 건너 왜와의 관계까지 완벽히 단속하기에는 백제가 처한 현실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웠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의 미스터리한 외교적 행보들은 배신이나 일탈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거대한 제국의 압박 속에서 각자의 국익을 극대화하려 했던 고대 국가들의 치열한 수 싸움이었으며, 백제는 그 혼란의 중심에서 왕실의 권위를 지키고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왜라는 변수를 통제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친 백제이든 반 백제 세력이든 그 중심에 백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왜라는 그 실체는 어느 날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져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그 뿌리를 백제와 한반도에 두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다음 회에서는 왜 5 왕의 미스터리를 추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