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 백잔(百殘)은 과연 고구려의 속민이었나?

by 목인

고구려의 심장을 쏜 백제의 화살


​광개토태왕비문은 그 전제부터 고구려 중심적 세계관에 매몰되어 있다. 비문을 작성한 장수왕은 "백잔(백제)과 신라는 본래 우리의 속민이었으며, 예부터 조공을 바쳐왔다"라고 서술한다. 과연 이것이 객관적 사실일까? 비문이 세워지기 이전의 역사를 복기해 보면 상황은 전혀 다르다.
​4세기, 백제와 고구려는 낙랑과 대방이라는 전략적 요충지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였다. 백제에게 이곳은 대륙 진출과 부여와의 연결을 위한 필수 통로였고, 고구려에게는 서해와 한반도 남부를 장악하기 위한 지정학적 교두보였다.
​이미 서기 246년 기리영 전투에서 백제는 낙랑의 측면을 공격하고 대방왕 궁모를 전사시키며 독자적인 군사 강국임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또한 286년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하자 백제가 구원군을 보낸 기록은, 당시 백제는 고구려와 대등하거나 또는 그와 비슷한 정도의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준다.


​패하의 궤멸과 고구려의 국치(國恥)


​313~314년,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과 대방을 축출하며 양국은 완충지대 없이 직접 맞닥뜨리게 된다. 369년 가을, 고구려 고국원왕이 2만 대군으로 남하하자 백제 근초고왕은 태자 귀수(훗날 근구수왕)에게 정예병을 주어 저지했다. 결과는 고구려의 참패였다. 5,000명의 고구려 병사가 치양의 들판에서 쓰러졌다.
​이 시기는 백제가 한반도 남부로 세력을 확장하고, 중국의 요서 등지에도 진출하던 근초고왕의 전성기였다. 복수심에 불탄 고국원왕은 371년 다시 남진했으나, 백제는 예성강(패하)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고구려군을 수중에서 궤멸시켰다.
​기세를 몰아 그해 10월, 근초고왕과 태자 귀수는 정예 기병 3만을 이끌고 북진하여 평양성을 포위했다. 이 전투에서 고국원왕은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이는 고구려 역사상 전무후무한 국치였다. 왕이 전사하고 세 차례의 큰 전쟁에서 완패한 고구려가 백제를 '속민'이라 기록한 것은 명백한 역사 왜곡이자 승자의 기록일 뿐이다. 고구려는 자신들을 궤멸시킨 백제를 '백번 죽여 마땅한 도적'이라는 뜻의 '백잔(百殘)'이라 비하함으로써, 패배의 트라우마를 역설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왜(倭)'라는 이름의 용병


​이제 비문에 기록된 '바다를 건너온 왜'의 실체를 파헤쳐 보자. 비문은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동시대의 기록을 교차 검증하면 모순이 드러난다.
​366년 백제의 사신 구저와 왜의 사마숙녜가 탁순국에서 만났고, 이듬해 백제 사신단이 왜의 신공왕후를 알현하며 파격적인 환대를 받았다.그리고 2년의 준비 기간을 거친후 구저가 직접 군대를 통솔하여 서기 369년, 왜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오게 된다. 이때 근초고왕은 심복 목라근자(木羅斤資) 장군을 보내 이들을 지휘하게 했다. 당시 왜에게는 없던 강력한 기마 전술을 보유한 백제군이 작전의 주도권을 쥐었음은 자명하다.
​이것이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인가? 백제 왕이 수년 전부터 왜와 소통하고, 자신이 보낸 구저가 인솔하는 왜군이 상륙하자 자신의 명장을 붙여 군사 작전을 수행하게 한 것은 왜가 '정복자'가 아니라 백제의 전략적 '실행자(용병)'였음을 방증한다. 고구려 2만 대군을 격파하고 왕까지 사살한 최전성기의 백제가, 전투 기록 하나 없이 왜의 신민이 되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허구다.


지워진 주인공, 근초고왕의 대해양 전략


​근초고왕은 평양성 승전 후 동진(東晉)과 수교하며 국제적인 위상을 공인받았다. 반면, 소위 '활약'했다는 왜는 이후 150년간 대외 외교 기록이 전무하다.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결코 왜가 될 수 없었다. 그 자리에는 동아시아의 바다를 호령하던 근초고왕이 서 있을 뿐이다.
​광개토태왕비문의 신묘년 기사는 고구려의 남진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이며, 이를 근거로 한 임나일본부설은 망상에 불과하다. 백제는 고구려의 속민이었던 적이 없으며, 왜는 근초고왕의 원대한 국가 경영 시스템 속에서 움직인 일종의 외곽 부대였을 뿐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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