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쓴 일본
여진은 대륙과 한반도 사이에, 왜는 한반도와 열도 사이에. 이 둘은 자리만 다를 뿐 쌍둥이 같이 닮았다. 주변이 강할 땐 숨죽여 살고, 주변이 약할 땐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우뚝 섰다. 여진은 금(金), 청(淸)을 거쳐서 대륙을 삼켰고, 왜는 야마토로 거쳐서 열도를 삼켰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여진은 자신의 뿌리가 신라에 있다고 인정하면서 이름조차 애신각라(愛新覺羅, 아이신 기오로)라고 하였다. 그러나 왜는 백제(百濟, 구다라)라고 하면서도 뿌리를 부정한다. 왜? 무슨 이유로 왜는 백제의 그림자를 지우고 싶어 할까?
여진과 왜의 사료적 격차는 역사를 기록하는 심리적 동기에 있다. 승자의 기록이 정통성의 과시라면, 패자의 기록은 존립과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여진의 기록 : 승자의 여유와 문명적 자신감
여진에게 역사 기술은 '성공의 공인(公認)' 과정이었다. 중원을 정복했다는 압도적인 자신감이 있었기에 뿌리를 숨길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문명국이자 투후 김일제의 후손임을 내세우는 신라·고려의 혈통을 가졌음을 밝히는 것은, 자신들이 한족(漢族)을 다스릴 자격이 있는 준비된 제국임을 선포하는 행위였다. '아이신 기오로'라는 성씨에 신라를 투영한 것은 과거의 연결고리가 현재의 승리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정복자의 여유이다.
왜의 기록 : 백강 전투의 참패와 생존을 위한 '신화적 도피'
7세기 말부터 준비한 일본 서기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탄생했다. 모든 국력을 쏟아부은 백강 전투(663년)의 참패는 야마토 정권의 존립을 뒤흔들었으며, 패배에 따른 책임론과 신라·당 연합군의 침공 공포 또한 상당했다.
이에 그들은 패배한 백제의 일원이라는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남기보다는, 흔들리지 않는 신의 혈통(천황)이라는 초월적 권위를 창조하여 내부 결속을 꾀했다. 초기 일본서기의 신화적 서사는 사실상 패배의 상처를 가리기 위한 거대한 붕대였다.
그러나 이 붕대 속의 진실은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더 정교하게 세탁되었다. 9세기 후지와라 가문은 권력 장악을 위해 백제에 예속되었던 정직한 기록들을 봉인하고 연대를 조작(이주갑인상)하여 필사본의 시대를 열었으며, 17세기 초 임진왜란 직후의 일본 조정은 조선에서 약탈한 활자 기술을 이용해 흩어진 파편들을 한반도의 정복자라는 욕망에 맞춰 재조립했다. 결국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일본서기는 패전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 시작되어, 침략의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 완성된 17세기에 완성된 게이초 목판인 것이다.
뿌리에 대한 고백과 증언
여진은 정사(正史)를 통해 자신의 혈통적 기원을 다음과 같이 당당히 명시하고 있다.
1. 금사(金史) : 시조의 출처에 대한 명시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 본기 제1권 '세기(世紀)'는 시조 함보(函普)의 유래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금의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 왔다."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
출처: 金史 卷1, 世紀
2.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 성씨와 국호의 기원
청나라 건륭제의 명으로 편찬된 만주원류고는 황실의 성씨인 '아이신 각라(愛新覺羅)'와 신라의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신라 왕은 김 씨이며, 국호는 계림이라 하였다. 금(金) 나라의 국호 역시 여기서 취한 것이다... 애신(아이신)은 금(金)을 뜻하며, 각라(기오로)는 성(姓)을 뜻하니, 이는 곧 김 씨(金姓)를 의미한다."
(新羅王金姓, 號鷄林, 金之國號蓋取諸此... 愛新爲金, 覺羅爲姓)
출처 : 滿洲源流考 卷7, 部族 (新羅/金)
3. 당당한 고백 vs 패자의 궁색한 선택
여진과 왜의 차이는 성공과 실패에서 오는 자신감과 실패와 열등심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구책의 차이이다. 여진은 뿌리를 밝혀 제국의 정통성을 강화했고, 왜는 뿌리를 숨겨 신화라는 가면 속에 숨어서 살 길을 선택했다.
4. 참고 : 우리 삼국의 경우
[신라 : 문무왕 비문에 새겨진 신라 김 씨 왕실의 명확한 기원]
"문무왕의 조상은 화관지후(火官之后)이시며, 15대조 성한 왕(星漢王)은 하늘에서 내리셨다. (중략) 투후 김일제가 천자를 받들어 7대를 전하니... 그 후손이 신라로 이어졌다."신라 왕실은 흉노 출신으로 한나라에서 투후에 봉해졌던 '김일제'를 자신들의 시조로 당당히 비문에 새겼다. 이는 외래 혈통임을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고대 문명권과의 연결성을 강조하여 왕권의 권위를 높인 사례이다.
[백제 : 국호를 '남부여'로, 성씨를 '부여씨'로]
백제는 "성왕 16년(538년),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였다." 또한 백제 왕실은 성씨를 '부여(扶餘)씨'로 삼았으며, 국가의 뿌리가 부여에 있음을 국호를 통해 공식화했다.
[고구려 :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진 '천제(天帝)의 아들']
고구려는 비문의 시작부터 자신들의 시조가 어디서 왔으며, 어떤 권위를 가졌는지 장엄하게 서술했다." 옛날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기틀을 세우셨으니, 왕은 북부여에서 나셨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셨다." 고구려는 자신들이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부여라는 뿌리를 인정하면서도, 시조가 천제의 아들이라는 '천하관'을 더해 자신들이 동북아의 중심임을 선포했다.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토대로 더 큰 자부심을 쌓아 올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