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245년!

왜(倭)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by 목인

기록의 1차 진공 : 147년의 행방불명

역사에서 147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한 왕조가 흥망성쇠를 겪기에 충분한 이 긴 시간 동안, 동북아시아의 한 축이었던 왜(倭)가 중국의 공식 기록에서 완전히 증발해 버린다. 서기 266년, 히미코가 진(晉) 나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왜는 중국 사서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다시 등장하는 것은 무려 한 세기 반이 지난 413년이다. 일본서기가 이 시기를 화려한 정벌과 승리의 기록으로 채우고 있는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현상이다.

과연 이 147년 동안 열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요서(遼西)에 진출한 백제

기묘하게도 왜가 사라진 그 시기에 중국 사서의 송서와 양서에서는 한반도의 한 국가에 대해 매우 이례적인 기록을 남긴다.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 또한 군사를 일으켜 요서를 근거지로 삼았다.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375)의 전성기를 전후한 이 시기, 중국 사서가 주목한 것은 왜가 아니라 백제였다. 백제는 한반도 남부 마한 세력을 병합하고 북으로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최고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서해 바다를 건너 중국 요서 지방에 '진평군'을 설치했다는 사실은, 당시 백제가 한반도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상반된 기록이 던지는 첫 번째 의문

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 의문을 던진다.

당시 왜가 정말로 광개토대왕비문과 일본서기에 묘사된 것처럼, 군대를 파견하여 한반도 남부를 평정하고 백제와 신라 등을 신민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14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중국과의 교류가 전무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된 것인가?
반면, 이 시기에 요서에 군현을 설치하고 평양성을 공격했던 근초고왕의 전성시대 기록을 남긴 중국 사서들의 시선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중국 사서에 왜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147년.

그것은 역설적으로 백제가 구축한 통치 질서(담로)가 얼마나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지표일지도 모른다.


구다라(百濟)의 균열과 계승자의 등장 : 침묵을 깬 '왜 5 왕'

침묵을 깬 왜 5 왕(413년~502년), 구다라(百濟)의 유고 사태.

147년이라는 영겁 같던 침묵은 413년, 비로소 깨진다. 중국 사서에 이른바 '왜 5 왕(찬·진·제·흥·무)'이 차례로 등장하여 독자적인 외교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한반도의 백제는 건국 이래 최대의 국난을 맞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396년 아신왕이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무릎을 꿇었고, 475년에는 장수왕의 공격으로 수도 위례성이 함락되며 개로왕이 전사했다. '구다라(百濟)'가 고구려의 무력 앞에 무너지고 구심점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바다 건너 있던 왜가 그 구심점을 이어받기 위해 중국 사서에 자신들의 이름을 직접 써넣기 시작한 것이다.


정통성의 계승 : "우리가 구다라의 공적을 이어받겠다"

특히 '왜왕 무(武)'가 478년 중국 송나라에 올린 상표문은 당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조상 대대로 갑옷을 입고 산천을 누비며 동서남북을 평정했다"라고 주장하며 한반도 남부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공인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것은 단순한 침략의 기록이 아니다. 백제의 유고 사태 속에서, 과거 자신들이 백제를 도와 수행했던 군사 활동의 기억을 꺼내 그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자 했던 몸부림이었다. 본사가 기능을 상실하자, 지사가 본사의 과거 실적을 내세워 대역으로 나선 형국이다.


다시 찾아온 2차 침묵 98년: '갱위강국'의 선포

하지만 이들의 활발한 외교 활동은 502년, 왜왕 무(武)의 기록을 끝으로 다시 거짓말처럼 중단된다. 이후 600년 견수사가 파견되기 전까지 또다시 98년이라는 긴 침묵이 다시 이어진다.
이 98년은 백제가 웅진과 사비에서 국력을 회복하던 재건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무령왕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여러 차례 고구려를 격파하고,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累破高驪, 更爲强國)"고 선포하고, 뒤를 이은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며 국가 시스템을 일신하던 시기다. 최근 부여 사비성에서 출토된 목간들은 당시 백제가 얼마나 정교한 행정망을 갖추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백제의 행정력과 외교망이 복구되자, 역설적으로 왜의 독자적인 기록은 다시 중국 사서에서 사라졌다.


지워진 245년이 던지는 최종적인 의문

이제 우리는 1차 147년과 2차 98년, 도합 245년의 공백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해 보게 된다.

이 연표의 행간에 무엇이 있는지는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왜 백제가 대륙과 해양을 호령하며 전성기를 구가할 때마다 왜(倭)의 기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가?

그리고 왜 백제가 고구려에 밀려 위기를 겪을 때만 왜의 이름이 중국 역사 전면에 등장하는가?

중국 사서가 기록한 '백제의 요서 진출'과 '사비성 목간'의 행정력,

그리고 그 시기마다 반복된 왜의 침묵.

이 팩트들의 조합은 당시 동아시아 해양 질서의 주권자가 누구였으며,

'구다라(百濟)'가 어떤 의미인지를 웅변하고 있다.


8세기 일본서기가 이 시기를 신화적 인물로 대체하며 지우려 했던 것은, 아마도 부정할 수 없는 이 '계통적 질서'의 실체였을지도 모른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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