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색

by 마르치아


사람은 누구나 흰 도화지 위에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입히지 않는 순수의 자리로 이 세상에 내려오고, 그 위에는 아직 어떤 의미도, 어떤 감정도 머물지 않은 백지 같은 고요가 있다. 그러한 자리 위에 한 사람의 삶이 시작되고, 아주 사소한 눈빛 하나, 무심한 말투 하나, 때로는 다정한 손길 같은 것들이 지나가며 그 흰 바탕 위에 처음으로 색이 스며든다.


그 색은 처음엔 흐릿하고 조심스럽지만, 시간이 흐르며 감정의 무게와 기억의 결을 따라 점점 더 깊어지고, 아주 미세하게, 그리고 거의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사람은 자기만의 색을 가지기 시작한다.


누구는 많은 경험과 많은 생각,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 주는 에너지, 과거와 현재가 겹겹이 남긴 자국으로 자신의 도화지를 다채롭게 채워나간다. 그 색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상처와 기쁨, 기대와 실망, 꿈과 현실이 서로 뒤섞여 만들어내는 고유한 무늬가 된다. 누구는 밝은 색만 덧칠하며 살아가려 애쓰지만 그 밝음이 겹치고 겹쳐질수록 오히려 어둡고 무거워지고, 또 어떤 이는 계속 어두운 색만 입히다가 뜻밖에도 그 깊은 어둠 속에서 밝은 빛 하나를 피워내곤 한다.


밝음과 어두움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태어난 가장 순수한 상태의 양면성이다, 하지만 한쪽으로만 치우친 색에는 왠지 힘이 느껴지지 않으며, 그 속에는 균형이 깨어진 감정의 왜곡이 서려 있는 듯하다. 여러한 색이 수만 번 덧칠된 사람은 그래서 더더욱 가치 있고, 그 어떤 설명 없이도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색이 그 사람의 삶을 대신 말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색계(色戒) 속에서 사람을 읽어내고, 관계를 유추하며 살아왔다. 빛의 경계에 서서 나와 타인의 색이 어디서 닿고, 어디서 어긋나는지를 바라보는 일은 나에게 있어 일종의 기도이며, 동시에 가장 조용한 관찰이기도 했다.


나와 같은 색의 사람을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같은 생각, 같은 감정, 같은 방향을 가진 사람과의 관계는 참으로 따뜻하고 안전하며, 그 안에서는 무언가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통하는 안도의 숨결 같은 것이 흐른다. 그러나 그 안전함에 안주할 때 우리는 빛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낯선 색들을 위험하다고 단정짓는 오류에 빠지게 되고, 결국 나와 다른 색을 가진 이들을 이해하기보다는 두려워하게 된다.


나를 바꾸지 않으려는 마음, 나의 색이 곧 옳다고 믿는 신념은 종종 타인의 세계를 너무 쉽게 왜곡하게 만들고, 그렇게 우리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너무나 익숙하게 규정하고 오해하는 실수를 반복한다. 그리고 그 오해는, 사실상 거의 대부분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겪은 경험이 가장 옳다고 믿는 마음, 내가 겪은 방식이 정답이라고 믿는 논리, 그 모든 것들이 다른 이의 색을 무시하고, 때로는 지워버리려 했던 교만의 시간으로 이어졌음을 나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많이 늦은 어느 날에서야 깨달았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 실수를 범하는가. 다른 이의 색을 인정하지 않는 그 졸렬함이야말로 우리의 내면을 가로막고, 의식의 성장을 지연시키며, 결국엔 우리 자신의 가능성을 갉아먹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에게 말해줄 필요가 있다.


진정한 성장은 다른 이의 빛의 끄트머리에 서 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그 조용하고 겸손한 용기에서 비롯된다. 상대가 나와 색이 같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람이 틀렸다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관계의 문을 스스로 걸어 잠그는 셈이며, 진짜 아름다움은 나와 다른 색을 지닌 그 사람을 그대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다름이 오히려 새로운 색을 만들어내고, 그 조화의 순간에야말로 '아름답다'는 말이 비로소 진정한 무게를 가진다. 살다 보면 내 색만을 고집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나 또한 누군가에겐 그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겸허하게 만든다. 내가 옳다는 신념과 믿음, 그리고 내가 본 세계가 곧 진리라고 믿던 그 어리석음으로 인해 나는 누군가의 빛을 덧칠했고, 그 사람의 색을 흐리게 만든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는, 그 교만한 시간을 조용히 내려놓기로 한다.


사랑이란 결코 내 색을 다른 이에게 덧칠하는 행위가 아니다. 사랑은 조용히 곁에 서서, 그 사람이 고유의 색을 마음껏 내어 놓을 수 있게, 나는 묵묵히 바탕색으로 머무는 일이며, 그 사람이 더욱 더 그 빛깔을 잃지 않도록, 혹은 그 빛이 선명하게 살아나도록, 나는 때로는 그와 비슷한 색으로 조용히 나란히 서서, 아무 말 없이 지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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