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화된 세월을 건드리면, 기억은 마치 그을린 철을 문지르듯 되살아난다. 잊었다고 생각한 그날의 냄새, 얼굴, 숨소리까지 한꺼번에 흘러나온다. 오래된 수첩 한 장을 넘기는 순간, 잉크 바랜 글씨가 다시 목소리를 갖는다. 누구의 말투였는지, 그때 내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다 감춰져 있던 것들이 슬며시, 그러나 또렷하게 되돌아온다. 나는 가끔 나 자신도 모르게 그 산화된 세월의 조각을 건드린다.
옛 사진첩을 펼칠 때, 문득 바람결에 실린 향기를 맡을 때, 혹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그 시절의 문을 똑, 하고 두드릴 때. 기억은 환원된다. 단지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 나는 다시 그 시간 안에 들어간다. 그 시간은 여전히 나를 품고 있었다는 듯 내게로 밀려온다. 하지만 그 환원은 아프지 않다. 이제는 다소 둥글게 깎인 슬픔, 시간이 만든 여백 속에서 조용히 반짝이는 온기다. 나는 알게 되었다. 세월은 산화되지 않는다. 그저 잠시 잊힌 채, 조용히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건드릴 용기가 생긴 어느 날, 비로소 진짜 ‘자기’를 다시 만난다. 얼마나 많은 문장들이 가마에 들어갔다 나와야 비로소 글다운 글이 되는 걸까. 얼마나 많은 경험들이 그 가마의 열기를 견디고 나와야 지혜로 탄생하게 되는 걸까. 그 뜨거운 과정을 거치지 않은 무엇을 감히 열정이라 부르지 못하게 됐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인내와 헌신을 통과하지 않은 덜 익은 감정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핸드폰 충전기 라인을 찾기 위해 서랍을 열다가 1974년도의 바랜 오십 원짜리 하나가 떨어졌다. 오래된 것들의 실체, 옛 어른들의 지혜, 경험을 통해 알아진 선험자의 지혜들, 이런 산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이렇듯 날것 같은 하루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을 텐데. 나는 바닥에 떨어진 그 산화된 동전을 주워 들었다. 많은 흔적들과 상처들이 지나간 자리.
나는 그런 상처와 힘듦 앞에서 나도 모르게 산화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둥글지 않는 모난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말이다. 남들처럼 많이 가지지 않거나 언젠가는 문득 내 삶이 초라하게 보일지라도 말이다. 언젠가는 그 잔상들로 인해 내가 나다워지고 내 삶이 울퉁불퉁하지만 고르게 보일 날이 있으려니 하고 하루하루를 옷깃을 여미는 마음으로 살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