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물처럼 살기를 원했다. 물은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바뀌고, 흐르는 대로 나아간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부드럽고, 지혜로운 삶이라 믿었다. 내 고집보다 타인의 감정을 먼저 헤아리고, 관계 속에서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애쓰며 살았다.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하지 않기 위해 웃었고, 내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상황을 먼저 읽었다. 나는 내가 유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나라는 사람이 흐려졌다는 걸 느꼈다.
물처럼 살아내느라, 내 온도와 결은 무뎌져 있었다. 감정은 억제되었고, 기쁨과 슬픔의 진폭이 줄었다. 누군가가 “괜찮냐”고 물으면, 나는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마음이 아닌 태도에서, 나는 언제나 괜찮아야 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진짜 나는 어딘가에 미뤄두고 흘러가기만 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그런 내가 참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며, 나조차도 외면한 채 살아온 나를 마주한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마음이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 어쩌면 그건 오래전부터, 내 안에서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를 잊지 말라고, 한때 사랑받고 싶었던 나를 기억하라고.
그때부터였다. 나에게서 나를 되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된 건. 나는 나에게 익숙한 방식이 아닌, 불편한 감정들을 끌어안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슬픔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고, 억울함을 참지 않고 말했고, 누군가의 눈치를 보기 전에 내 마음이 먼저 어떤지 물었다. 말하자면 나는 나와 관계를 다시 맺는 중이었다.
감정 하나를 꺼내어 끌어안고, 울며 놓아주는 연습을 매일같이 반복했다. 때로는 뒤늦은 분노가 올라오기도 하고, 이유 모를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엎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면서, 그 어디쯤에서 나는 나다워지기 시작했다. 그건 아주 조용한 변화였다. 갑작스럽게 거창해지는 삶이 아니었고, 소리 없이 찾아온 작은 균열들이 내 마음의 틈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그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걸 보았다.
이후로 나는 나처럼 사는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이 애틋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너무 열심히 웃고 있는 사람, 너무 조용히 있는 사람, 자신을 끝없이 다그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마주하면 마음이 저렸다. 나는 그들의 말하지 못한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그 감정들을 꺼내주고 싶었다. 쉬지 않고 일하고 있는 누군가의 삶 속에 불쑥 끼어들어, 쉼표처럼 앉아 웃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날, 마침내 알게 되었다. 나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타인의 기대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 솔직해지는 일이라는 것을. 사랑받기 위해 나를 감추는 삶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로 서는 일이라는 것을.
독일 철학자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나는 이제야 그 문장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자유로워진다는 것이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타인이든, 나 자신이든.
그렇게 생각하면, 나로 살아가기 시작한 지금의 나는, 이전보다 더 단단해졌고 더 유연해졌다. 이제 나는 누군가의 말보다 내 안의 속삭임에 먼저 귀를 기울인다. 거절당할까 두려워 마음을 숨기기보다, 내 진심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려 한다. 어쩌면 그건 여전히 두렵고 느린 걸음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알게 되었다. 진심은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도록 남는다는 것을.
나는 이제 수국을 꺾지 않는다. 수국의 헛꽃을 지나 그 안에 숨어 있는 작고 수줍은 진짜 꽃처럼, 나도 내 안의 진심을 조용히 지키며 살아가고자 한다. 비바람에 흔들릴지라도 씨앗을 맺는 꽃처럼, 내가 걸어가는 이 느린 걸음도 언젠가 무언가를 품게 될 것임을 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나처럼 살아왔던 사람이라면, 너무 오래 물처럼 살아내느라 지쳐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나라는 이름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길 바란다. 익숙한 방식 대신 낯선 감정을 마주할 수 있다면, 거기서부터 진짜 삶은 시작될 것이다.
나를 너무 몰아붙이지 말자. 때로는 느려도 좋다. 불안해도 괜찮다. 다만 그 속에서도 자기 자신에게는 진실해지기를. 그렇게 자신에게 조용히 다가가는 하루하루가 쌓이면, 결국 우리는 우리답게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늦게 배운 가장 소중한 진리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