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이란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대체로 '공로'나 '수행의 결과'를 떠올린다. 누군가가 고생해서 얻은 결과물, 혹은 자신이 쌓아온 어떤 무형의 덕 같은 것. 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이 '공'이라는 단어가 그보다 훨씬 더 깊고, 조용하며, 차마 말로 옮기기 어려운 세계를 가리키고 있다고 느껴왔다.
불가에서 말하는 功은 단순한 업적이 아니다. 그것은 비움의 힘, 사라짐의 역설, 존재가 가장 투명한 순간에 스며드는 어떤 진동 같은 것이다. 우리가 말하기 전의 침묵처럼, 울기 전의 고요처럼, 공은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의 ‘있음’이다. 창세기의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는 말과 이 불가의 공 개념 사이에 나는 오래도록 어떤 공통된 숨결을 느껴왔다.
창세기는 말한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으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있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이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눈을 감고, 말해지지 않은 시간 속을 떠돈다. 그리고 그 흑암 위에 머물던 어떤 떨림, 그 진동이야말로 불가에서 말하는 '공'과 닿아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공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충만이 일어나기 위한 준비의 자리다. 창세기의 하느님이 말씀하시기 전의 그 잠잠함, 그 어둠 속 떨림이 바로 '공'이다. 그것은 존재가 사라지며 생겨나는 에너지이고, 삶이 멈추는 곳에서 다시 시작되는 흐름이다. 창조는 그 흐름 위에 실려 온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공로’라는 단어조차 새롭게 들린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쌓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가며 다다른 어떤 경지. 그렇게 보면 공은 결코 나의 자랑이 될 수 없고, 오히려 내가 겸손히 받은 은총이어야 한다. 공은 자랑이 아니라 감사다.
우리는 종종 고통을 두려워한다. 인생의 실패와 악연 앞에서 좌절한다. 그러나 공은 말한다. 그 고통이 바로 다음 차원으로 향하는 사다리였다고. 창세기의 하느님도 혼돈과 흑암 위에 있었고, 불가의 수행자도 고요 속에 앉아야 공을 얻는다. 고난은 길이며, 어둠은 문이다.
이제 나는 묻는다. 공은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그 공이 맞는 걸까? 혹시 그것은 창조 이전의 사랑, 존재 이전의 숨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깊은 곳에서 조용히 생명을 키워내는 ‘텅 찬 자리’는 아닐까?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서성인다. 그리고 감사한다. 비로소 내가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살아 있다는 사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