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3화 당신이라는 싯점

당신을 잊기까지 수많은 나를 보내야 했다

by 마르치아
하루를 견디는 일이 이렇게 고된 날들이 있었다.



침묵이 가장 무거운 짐이 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가 내게는 너무도 많은 일을 겪은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말한다. 지나간 사랑은 추억이 되면 된다고. 그러나 나는 안다. 어떤 사랑은 추억이 아니라 퇴적층처럼 마음속에 쌓여, 그 무게로 나를 더욱 깊이 가라앉힌다는 걸.



잊기 위해 애썼다. 당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새로운 습관을 들이고, 당신과 걷던 길을 일부러 외면하며 돌아갔다. 익숙한 음악을 피하고, 당신이 좋아하던 계절에는 일부러 다른 곳을 찾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회피가 결국 당신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사람. 그게 바로 당신이었다.




어느 날은 거울을 보다가 낯선 내 표정을 발견했다. 웃는 게 어색해졌고, 눈빛엔 늘 쓸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당신을 잃고 난 뒤, 내가 나 자신을 놓아버렸다는 걸. 당신을 사랑하는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이 나를 주었는지를. 그 사랑은 나를 비워내는 일이기도 했고, 동시에 나를 만들어가는 일이기도 했다.



사랑을 끝낸다는 건 결국 나의 일부를 떠나보내는 일이었다. 당신이란 이름을 더는 부르지 않기로 결심하는 그 순간, 나는 나 안의 어떤 시절을 함께 묻었다. 그 시절엔 당신이 있었고, 나의 웃음이 있었고,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매일 조금씩 나 자신을 장례 치르며 살아냈다. 오늘은 웃던 나를, 내일은 기다리던 나를, 그다음 날은 기대하던 나를.



가끔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당신의 이름이 올라왔다. 아직 다 지나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아직도 내 안에는 당신의 계절이 머물러 있다는 신호였다. 나는 그 계절을 억지로 내쫓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당신은 갔지만, 당신이 남긴 시간들은 내 안에서 어떤 씨앗이 되어 자라고 있었으니까.



지금의 나는, 당신과 멀어졌기에 오히려 가까워질 수 있었던 진짜 내 마음을 보고 있다. 당신을 사랑했던 그 마음, 그 진심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그 모든 눈물과 망설임이 어쩌면 나를 다시 나답게 만드는 길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사랑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삶을 이끌어주는 것이란 걸.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2화 당신이라는 싯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