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신앙은 무릎을 꿇는다
많은 비신자들이 천주교의 미사를 처음 접할 때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일어섰다 앉았다, 때로는 무릎까지 꿇어야 하는 예식의 흐름은 어쩌면 지금 시대의 속도와 편의에 익숙한 이들에겐 낯설고 번거롭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성체를 모시기 위해 제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그 행위도, 어떤 이들에게는 불필요한 형식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기 때문에, 아니,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미사는 초대다. 이 세상의 모든 무게를 짊어진 이들에게 하느님이 보내는, ‘지금 여기’라는 시간에 대한 부드러운 초대다. 그 초대는 거창한 말로 우리를 설득하지 않는다. 오히려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너는 나를 만나고 싶은가?” 그 물음 앞에 인간은 어떻게 서 있어야 할까.
장궤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인간의 교만한 중심축을 내려놓는 일이다. 우리가 삶에서 그토록 붙들고 살아가는 ‘자존’이라는 허깨비가 사실은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 것인지, 그 자리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알아차린다.
그렇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패배가 아니다. 항복도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방식이며, 존재의 방식이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는다. 어린 자식 앞에서, 죽어가는 연인 앞에서, 용서를 구하는 이 앞에서,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을 창조하신 그 앞에서.
장궤는 몸의 예식이 아니라, 영혼의 본능이다. 그것은 언어보다 더 깊고, 생각보다 더 빠르며, 인간의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가장 정직한 자세다.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이 여전히 내 안에서 살아 숨 쉰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왜 하느님은 인간에게 직립보행을 주셨을까. 왜 네 발로 걷는 짐승의 세계에서 인간만이 두 발로 서게 되었을까. 그것은 어쩌면,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두 발로 서서 살아가되, 그 모든 의지의 절정에 다다랐을 때, 다시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존재로 빚어진 것이 우리 인간의 본질이 아닐까.
그리고 이 모든 사랑의 구조는 결국 ‘부모와 자식’의 형태로 돌아온다.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강한 자와 약한 자, 치유자와 환자, 제사장과 백성, 모두가 어떤 형태로든 어미와 자식의 관계를 닮아 있다. 진짜 강한 자는 자식을 품는 어미의 마음을 가진 이다. 미사에서 무릎을 꿇는 신자는, 바로 그 어미의 심장으로 하느님의 품에 자신을 내려놓는 이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이 기도는 단순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무능과 상처, 교만과 비통, 삶의 파편들을 모두 껴안고 다시 그분의 입김으로 생명을 얻는 부활의 순간이다.
그러나 점점 장궤는 사라지고 있다. 교회에서조차 장궤는 이제 ‘불편함’이라는 이유로, 혹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으로 조용히 퇴장당하고 있다. 어쩌면 교회는 점점 무릎 꿇는 신앙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묻고 싶다.
우리는 무엇을 상실하고 있는가.
그 불편함 속에 담긴 진실은, 오히려 가장 편안한 위로였음을 언제쯤 깨닫게 될까.
무릎을 꿇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무릎을 꿇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다.
무릎을 꿇을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 앞에 돌아갈 수 있다.
기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손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장궤는, 인간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예배의 자세다.
나는 오늘도 그 무릎 위에서 내 존재의 중심을 다시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