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밥상 차리는 순서

마음을 내는 순서

by 마르치아




밥상에는 순서가 있다.

그 순서는 단지 음식을 놓는 순서가 아니라,

마음을 준비하고 자리를 내어주는 질서이기도 하다.


우리 집 밥상은 엄마가 차리셨다.

작고 단정한 괴나리 호족반 위에

엄마는 늘 말없이 상을 닦았고,

마른 수건을 따라 다니는 손끝은 하루의 바쁨보다 더 조용했다.

작은 사기그릇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아가고,

국이 김을 피우며 오른편에 놓이면

그제야 밥이 상 위에 마지막으로 올라왔다.


어릴 적, 나는 물었다.

“왜 밥은 맨 마지막에 올려요? 밥부터 먹는 건데요.”


할아버지는 웃으며 나를 무릎에 앉히고 천천히 말씀하셨다.

“밥은 말이야, 제일 중요한 거야.

근데 중요한 건 언제나 마지막에 오는 거란다.

김치도 먼저 오고, 나물도 먼저 오고, 국도 자리 잡고 나서야

밥이 조용히 가운데 앉을 수 있는 거지.

밥이 먼저 오면, 다른 반찬들이 어딜 앉을지 몰라서 자꾸 흔들려.



그러면 밥상도 마음도 어지러워지는 거야.”


그 말은 단순한 식사 예절이 아니었다.

밥상은 엄마가 차렸지만,

그 질서와 온기를 설명해준 사람은 할아버지였다.


엄마는 반찬 하나하나를 손으로 눌러 담으셨다.

시금치는 된장에 조물조물 무쳐 작은 유리그릇 안에 가지런히 놓였고,

멸치볶음은 마지막까지 식지 않도록

뭉근한 불을 맞은 후 조심스럽게 담겼다.

그날그날 사정에 따라 반찬 수는 달랐지만

엄마는 말없이 자리를 채우셨고,

내가 먹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셨다.


할아버지는 그 모든 걸 지켜보시고

밥이 마지막에 올라오는 이유를 내게 한마디 더 들려주셨다.

“밥그릇은 무겁잖니.

무거운 건 가운데 있어야 해.

그래야 상이 기울지 않아.

밥이 무겁다는 건, 그 안에 힘이 있다는 뜻이야.

살아갈 힘 말이야.”


밥을 마지막에 올린다는 것은

중심을 나중에 두는 지혜였다.

모든 자리가 정돈된 뒤에야

중심이 흔들리지 않고 자리할 수 있다는 삶의 순서이기도 했다.


지금 나는 어른이 되었다.

이제 밥상을 차리는 일은 내 몫이 되었고,

그 상을 닦는 손끝에

엄마와 할아버지의 숨결이 조용히 따라온다.


젖은 행주로 나무 상판을 닦을 때,

엄마가 물기를 꼭 짜내던 손의 감촉이 떠오르고

국이 뭉근히 끓는 동안

할아버지가 나를 무릎에 앉혀 이야기하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밥을 가장 마지막에 올린다.


모든 반찬이 제자리를 찾고,

국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젓가락이 가지런히 놓이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밥그릇을 상 한가운데에 올려놓는다.


그 순간, 상이 하나의 풍경처럼 완성되고

내 마음도 고요히 자리를 잡는다.

밥은 여전히 무겁고,

나는 여전히 그 무게를 중심에 둔다.


그날 할아버지가 내게 해주셨던 말을

나는 이제 나 자신에게 되뇐다.

“중요한 건, 언제나 마지막에 오는 거란다.”


나는 그 말을 기억하며

오늘도 누군가를 위해 상을 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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