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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떼루아에 대하여

by 마르치아




요리를 하기 전 재료의 떼루아를 음미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늘 칼을 들기 전에 잠시 멈추어 선다. 손바닥 위에 올려둔 토마토가 어떤 햇살을 받아왔는지, 쌀 한 톨이 어떤 바람과 물을 지나왔는지 떠올린다. 그것은 단순한 준비가 아니다. 흙과 빛과 계절이 빚어낸 이야기를 잠시 경청하는 의식, 그 순간 요리는 이미 절반쯤 시작된다.

떼루아라는 단어는 와인에서 출발했지만, 사실 모든 재료에는 떼루아가 있다. 바닷가에서 자란 미역에는 파도의 소금기가 배어 있고, 산에서 자란 나물에는 숲의 그늘과 바람이 깃들어 있다. 도토리 가루를 풀면 곶자왈 숲의 향기가 되살아나고, 갓 딴 귤의 껍질을 벗기면 손끝에 제주의 햇빛이 번진다. 나는 그 맛과 향 속에서 계절을 보고, 땅의 숨결을 듣는다.

요리를 한다는 것은 결국 자연의 색을 한 그릇에 담는 일이다. 당근의 주황빛은 저녁놀처럼 국물 속에 퍼지고, 시금치의 초록은 봄 숲의 바람처럼 번진다. 토마토가 풀어내는 붉음은 여름의 열기를, 버섯이 우려내는 갈색은 가을 낙엽의 깊이를 닮았다. 계절은 이렇게 매일의 밥상 위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나는 점점 더 깨닫는다. 재료의 떼루아를 음미하는 일은 곧 사람의 떼루아를 존중하는 훈련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각자의 땅에서 자라났다. 어떤 이는 바람 센 해안가에서, 어떤 이는 돌투성이 밭에서, 또 어떤 이는 물길이 많은 들판에서 뿌리를 내렸다. 그 땅과 계절이 우리를 만들었고, 그 흔적이 지금의 얼굴과 말투, 습관과 성격이 되었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지닌 떼루아를 존중하는 일이다.

그리고 사랑은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정의해본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떼루아에 말 없이 다녀오는 것. 그가 자라온 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흙냄새와 바람, 비바람의 흔적을 존중하는 일. 그가 왜 그렇게 웃는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왜 때로는 쉽게 울거나 화를 내는지 그 이유를 캐묻지 않고, 그저 그의 떼루아를 걸어보고 돌아오는 일. 그것이 사랑의 본질 아닐까.

사랑은 결국 요리와 닮았다. 마늘의 매운맛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올리브유로 감싸 부드럽게 만들어주듯, 호박의 과한 단맛을 소금으로 눌러 균형을 맞추듯, 서로의 떼루아를 조율하고 어울리게 할 때 비로소 온전한 맛이 난다. 억지로 바꾸려 들지 않고, 본래의 향을 살려주는 것이 요리의 지혜이자 사랑의 지혜다.

한 사람의 떼루아에는 꽃만 피어 있지 않다. 메마른 땅의 갈라진 흔적도 있고,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상처의 골도 있다. 어떤 날은 폭우가 쓸고 간 자리에 무너져 내린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사랑은 그곳을 피하지 않는다. 사랑은 그 땅을 조용히 걸어본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고요한 웅덩이에 발을 담가 본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돌아와 그를 바라본다. 그 침묵 속에서 전해지는 고백 ― “나는 네 땅을 다녀왔다. 나는 네 떼루아를 존중한다.”

진정한 사랑은 그래서 한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의 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땅의 척박함마저도 그의 맛이고, 그 바람의 세기도 그의 향기다. 그 모든 것을 합쳐야만 한 사람의 전체가 완성된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떼루아를 부정하려 들 때가 많지만, 그것은 결국 그의 존재를 반쪽만 받아들이는 일이다.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토양과 계절, 눈물과 웃음을 모두 맛보는 것이다.

나는 믿는다. 만약 사람들이 서로의 떼루아를 존중할 줄 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덜 요란하고 훨씬 더 향기로울 것이다. 상대의 말투에 스민 억양이 고향의 바람임을 이해하고, 그의 고집이 지난 시절의 시련에서 비롯된 것임을 헤아린다면, 우리는 더 이상 쉽게 다투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그저 달콤한 입맞춤이 아니다. 사랑은 그의 땅을 걸어본 이에게만 허락되는 깊은 공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요리를 하며 다짐한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요리를 하기 전 재료의 떼루아를 음미하는 것처럼, 그 사람의 떼루아를 온전히 느끼고 존중하는 일이다. 그 안에 깃든 빛과 그림자, 계절의 흔적, 흙의 향기와 바람의 세기를 함께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안아줄 때, 사랑은 가장 진실한 형태로 우리 앞에 선다.

사랑은 결국 말이 아니라 체험이다. 그 사람의 땅을 걸어보고, 그의 하늘을 바라보고, 그의 강을 건너본 이만이 알 수 있는 진실이다. 나는 오늘도 믿는다. 언젠가 내 떼루아를 걸어와 줄 단 한 사람을, 말없이 다녀가고도 미소로 돌아와 줄 그 사람을. 그리고 그 사람이 남겨놓고 간 발자국 위에 나는 다시 요리를 하고, 다시 삶을 살아내며, 다시 사랑을 배운다.

그 순간, 떼루아는 더 이상 재료의 것이나 땅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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