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덜컹거리는 소리 덕에 잠에서 일찍 깨어났다. 빈집의 문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았다.
총 네개의 방이 있지만 유일하게 이 건물에는 나만 산다. 조용한 새벽에 들리는 그 소리는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이따금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던 불안의 울림 같기도 했다. 덜컹거림은 늘 그렇게 시작된다. 외부에서 온 소리인데 어느새 내 안에서 진동한다. 나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한참을 누워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삶에도 이런 덜컹거림이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치 못한 일들, 문득 닫혀버린 관계, 갑작스러운 상실 같은 것들. 그것들은 모두 내 영혼의 평화를 흔들어 놓았다. 영혼의 고요를 바라는 사람에게 덜컹거림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파문이다. 삶의 뿌리까지 흔드는 진동이다.
그러나 덜컹임이 지나고 나면 다시 일상은 제자리를 찾는다. 처음엔 놀라고 두려웠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소리에도 익숙해진다. 그것이 적응이고 어쩌면 살아남는 방식이다. 모든 생은 덜컹거리며 움직인다. 바람도, 파도도, 나무의 그림자도, 심지어 별빛조차 미세하게 흔들리며 제 궤도를 찾아간다. 그러니 인간의 삶이 덜컹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소리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다. 어떤 이는 귀를 막고, 어떤 이는 그 리듬에 몸을 맡긴다. 나는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덜컹임이 있어야 길이 열린다는 것을. 완벽히 매끄러운 길에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다. 덜컹임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사랑도 그랬다. 심장이 덜컹거린 사랑이 몇 번이나 지나가니 나는 어느새 중년의 여자가 되어 있었다. 사랑의 진동이 심장 깊은 곳을 울릴 때마다 나는 부서지고 또 다시 일어섰다. 덜컹 내려앉는 사랑의 기억들이 내 안에 층층이 쌓여 나를 만들었다. 그 사랑들이 다 지나간 후에 남은 것은 놀랍게도 슬픔이 아니라 고요였다. 그 고요는 단순한 평화가 아니라 수많은 덜컹임을 지나온 이만이 누릴 수 있는 정적이었다.
이제 나는 묻는다. 남은 사랑은 얼마나 될까. 다 써버린 건 아닐까. 신에게 묻고 싶다. 허락된 사랑이 아직 남아 있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성숙한 사랑을 하고 싶다고. 누군가를 소유하지 않고 누군가의 그림자에 기대지 않는 사랑.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고 흔들림 속에서도 함께 숨 쉬는 사랑. 덜컹임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소리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알아듣는 사랑.
삶의 덜컹임은 나를 놀라게 했지만 사랑의 덜컹임은 나를 깨웠다. 덜컹거림 속에서 나는 무너졌고 또 일어섰다. 이제 나는 흔들림을 피하지 않는다. 덜컹임이 나를 데리고 가는 방향에 순응하며 걸을 뿐이다. 살아 있다는 건 결국 불안정 속에서도 존재를 이어가는 일이다. 완벽히 고요한 세상은 죽음과 닮아 있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덜컹이는 삶 속에서 조금씩 생을 배운다.
가끔은 신에게 묻는다. 왜 이토록 흔들리게 하시냐고. 그러나 곧 알게 된다. 흔들림이 없다면 나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덜컹임이 없다면 나는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덜컹임은 결국 나를 다시 나에게로 데려온다.
이제 나는 그 소리가 무섭지 않다. 바람이 불면 문이 흔들리고 마음이 흔들려도 나는 그 안에서 나를 듣는다. 덜컹거림은 멈추지 않겠지만, 이제 그 소리는 내 안의 기도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덜컹임을 품으며 나는 천천히 깨닫는다. 완전한 고요는 없다는 것을.
그 대신 흔들림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고요가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