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독의 기쁨

by 마르치아




고독과 고립은 전혀 다른 단어다. 고독은 출발점이 자기 자신이고 마침표도 자기 자신이다. 그에 반해 고립은 되어지는 것이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밀려나는 상태, 누군가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일. 나는 이제 그 차이를 안다. 그리고 지금은 고독의 기쁨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것이 내게 얼마나 큰 감사인지 모른다.


나는 조실부모하고 형제 없이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외로움이란 단어는 나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이라고 믿었다. 외로움은 언제나 내 뒤에 따라다녔고 마치 목 뒤에 붙어 있는 꼬리표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고립과 고독의 경계선을 오가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정확히 외로움인지조차 몰랐던 그 세월, 그저 익숙한 듯 살아왔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바닥을 들여다보니 그 모든 것이 신이 내게 준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아홉 살 때 별이 되셨다. 그 순간 외로움은 내게 바꿀 수 없는 운명선이 되었다.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받아들임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 외로움을 진정으로 수용했다. 그것이야말로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고독의 시간 속에서 나는 나를 보았다. 신의 음성이 들렸고 다른 이의 아픔이 보였다. 그제야 고독의 참맛을 알았다. 고독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고 그 거울 속에서 나는 사유하고 성찰하며 창조와 혁신의 열매를 맺었다.


계절의 흐름과 생의 소리, 생명의 움직임, 색의 변화, 의식의 흐름.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며 나는 깨달았다. 내가 지금 수행하듯 살아가는 일, 창조자의 창조성에 참여하는 일, 그 모든 기쁨이 고독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고독을 뿌리 삼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신을 사랑하는 일도 고독의 뿌리가 없었다면 불안한 모래 위의 집과 같았을 것이다. 고독은 내 신앙의 토대이며 나를 단단하게 세운 기둥이었다. 고독은 내게 하늘과 땅을 잇는 기도였고, 내가 나를 붙드는 가장 깊은 힘이었다.


외롭다는 것은 고독과는 분리된 감정이다. 외로움은 결핍이고 고독은 충만이다. 외로움은 누군가의 부재에서 오지만 고독은 자기 안에서 피어나는 충만함이다. 그 둘 사이를 오가며 나는 살아간다. 그 흘러넘치는 충만함 속에서 비로소 내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라도 나를 고독 속에 담근다. 생각하고 사유하고 사색하며 산다. 그런 시간이야말로 내게 가장 유익하고 감사하며 감미롭다. 그 고요 속에서만 들리는 소리가 있고, 그 침묵 속에서만 피어나는 생의 향기가 있다.


관계란 이런 담금질을 거친 사람들이 만나야 비로소 유익하다. 외로움이라는 결핍으로 다가온 인연은 늘 어딘가 모자란 채 끝났다. 하지만 충분한 고독의 시간을 지나온 인연과는 비로소 참된 인연이 되었다. 서로의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 마주한 만남, 그때야 나는 관계가 주는 은총을 느꼈다.


외로움과 고독은 비록 종이 한 장 차이지만 나의 모든 창조는 고독의 시간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그 시간 속에서 문장을 짓고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신도 세상을 창조할 때 얼마나 고독했을까. 아마도 그분의 고독은 사랑의 씨앗이었을 것이다. 나의 고독 또한 그분의 고독을 닮아 결국 사랑으로 피어났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고독을 사랑한다. 고독 속에서 나를 만나고 그 안에서 신을 만난다. 그리고 그 만남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가장 깊은 기쁨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