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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는 싯점

by 마르치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숨이 흐른다. 들숨과 날숨. 보살피고 보살핌을 받는 그 사이에서 우리는 서로의 온도를 배운다. 들숨이 깊어지면 생명이 자라고 날숨이 과도하면 숨이 턱에 찬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받는 것이 지나치고 주는 것이 넘쳐나면 그 관계는 더 이상 관계가 아닌 계산의 저울로 변한다.


사람들은 관계를 정의하려 할 때 늘 타인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관계의 정의는 나로 시작해 나로 마쳐져야 한다. 타인을 통해 결국 나라는 인간을 이해하게 되는 그 순간이 바로 관계의 시작이다.


그래서 진짜 관계를 잘 맺는 사람들은 상대의 눈빛 속에서 자신을 읽는다. 상대의 표정에서 내 마음의 결을 보고, 상대의 말투 속에서 내 감정의 울림을 알아차리고, 상대의 태도 속에서 내 욕망을 비춘다. 우리는 그러한 인연의 더께를 몇 번이고 벗겨내며 진짜 인연의 의미를 배운다.


인연이란 어떤 계산도 가식도 없이 맑은 마음으로 마주한 사람들 사이에 피어난다. 무엇을 주고받지 않아도 마음이 편하고, 함께 있지 않아도 외롭지 않은 관계. 그런 인연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수많은 상처와 걸림돌을 마주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골라내려 들지 않고, 그 상처를 통해 내 안의 반응을 살피어 깨닫는다. 관계의 싹은 그때부터 발아한다. 사람들은 관계를 빨리 규정짓는다. 그러나 관계는 그렇게 쉽게 얻어 걸리듯이 건져지는 게 아니다. 정말 많은 헤어짐과 상처를 딛고 일어나야만 비로소 보인다.


사람들은 관계를 너무 빨리 정의하려 한다. 단 한 번의 대화, 한 번의 웃음으로도 그 관계의 이름을 지어버린다. 반면 어떤 이는 오랜 시간 침묵 속에 머물며 관계의 의미를 더디게, 그러나 깊게 써 내려간다. 관계는 서둘러 붙잡을수록 얄팍해진다. 깊이는 기다림 속에서만 만들어지고, 진정한 인연은 흘러가게 두었을 때 오히려 더 단단해진다.


진짜 인연은 같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같고, 오히려 헤어져 있을 때 더욱더 진실해진다.


나는 어릴 적부터 모든 관계의 도식을 상상해 왔다. 모든 사람의 머리 위로 가느다란 실 하나가 뻗어 나와 서로 교차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 실들은 서로 교차되어 있고, 끊어졌다가 또 다시 이어지며 선이 되고 면이 되고 공간이 되었다. 그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만나고 멀어지고 다시 이어졌다. 나는 그 실들이 마치 하늘에서 흘러내린 빛처럼 느껴졌다.


그 실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했다. 사랑의 실은 따뜻했고 미움의 실은 거칠었으며, 고독의 실은 투명했다. 그 실들은 서로를 당기며 흔들리고 또 멀어지며, 보이지 않는 힘으로 우리를 묶었다. 그것이 관계였다. 그것이 세상을 잇는 방식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고독과 은총 사이, 그리고 다른 이와 나를 서로 꿰매며 우리는 살아낸다. 누구는 상처 난 자리 위를 꿰매고, 누구는 헤어진 틈을 꿰매며 살아간다. 꿰맨다는 것은 다시 이어 붙인다는 뜻이지만, 그 안에는 고통이 숨어 있다. 바늘 끝이 살을 찌르듯 관계는 아프고, 그러나 그 아픔이 지나가면 따뜻한 온기가 남는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안다. 사람은 모두 자신이 꿰맨 만큼 성숙해진다는 것을. 그리고 그 꿰매진 자리마다 삶의 무늬가 생긴다는 것을. 그것이 관계의 무늬이고, 살아 있음의 증거다.


신이 마지막 날에 나에게 물을 것이다. “너는 그동안 무엇을 꿰매며 살았느냐.” 그 물음 앞에서 나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씨실과 날실이 교차된 작은 천 하나를 내어드릴 것이다. 그 천에는 수많은 인연의 실이 엮여 있을 것이다. 사랑과 이별의 실, 고독과 은총의 실, 이해와 오해의 실이 얽혀 있을 것이다.


그 작은 천은 완벽하지 않을 것이다. 어딘가는 삐뚤고, 어딘가는 매듭이 엉켜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인생의 직물이고, 내가 꿰맨 모든 흔적의 증거다. 나는 그 천을 조용히 내어드릴 것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그것을 펼쳐보실 때, 나는 미소 지을 것이다.


그 안에는 내가 사랑하고, 잃고, 깨달으며, 은총으로 이어온 모든 인연의 무늬가 고요히 스며 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당신과 나 사이에 흐르는 그 보이지 않는 실들처럼. 그 실들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었다.


이제 나는 안다. 관계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꿰매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복이 삶을 만든다. 당신과 나 사이에 흐르는 이 실 하나가, 오늘도 나를 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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