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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기억하는 방식

사랑의 다른 이름

by 마르치아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에는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스며 있다. 어떤 이는 남의 말을 바람처럼 흘려보내고 어떤 이는 지나가듯 던진 단어 하나에도 마음의 등불처럼 불을 켜둔다. 나는 오래전부터 마음에 스친 작은 온도들을 무심히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건넨 말의 결을 기억하고, 그 결에 담긴 온기를 오래 품고 살아왔다. 그 기억이 내 삶의 체온이 되었고 내가 건너온 시간의 궤적을 만들어냈다.


어떤 마음은 금방 사라진다. 그러나 어떤 마음은 시간이 더해질수록 깊어진다. 그 마음은 오래 묵힌 장아찌와 닮아 있다. 처음엔 짠맛이 먼저 닿다가 시간이 흐르면 단맛이 스며들고 그 뒤에 어렴풋하게 올라오는 향까지 삶 전체를 감싸는 맛이 된다. 사람의 마음도 그러하다. 급히 다가오는 마음은 금세 증발하고 천천히 스며든 마음은 오래 남아 묵직한 결을 만든다. 나는 그 묵직한 결을 기억하려 애써왔다.


며칠 전 장아찌 이야기를 나누던 중 참외나 울외 장아찌를 좋아한다는 말을 스쳐 지나가듯 던졌었다. 그런데 그 말을 기억하신 분이 집에 있는 참외와 노각 절임을 가져다주셨다. 그 작은 정성에 나는 뜻밖의 감동을 받았다. 달래를 캐서 주시고 시금치까지 뽑아다 주셨다. 그 모든 것이 “그냥 생각났어요”라는 말 한마디에 담겨 있었다. 정성스럽게 얇게 썰어서 피클을 담아 놨다. 귀한 사람이 오면 꺼내어 양념에 무쳐서 밥상위에 놓아줄 것이다. 사람을 이렇게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말끝에 묻어 있던 작은 취향까지 마음의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어느 날 조용히 꺼내어 건네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삶을 부드럽게 익혀온 사람이다. 그 내공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깊이 있게 쌓인 삶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온도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아왔다. 누군가에게 받은 따스함을 오래 기억하고 작은 마음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방식으로. 고마움이라는 감정은 손에 크게 잡히지 않지만 살아갈수록 그 미세한 결이 더 선명해진다. 어떤 날은 밥상에 오른 장아찌 한 조각에서 그 고마움을 발견하기도 한다. 오래 숙성된 맛 속에 오래된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음을 기억하는 일이 결국 나를 지탱해왔다.


고마움을 기억하는 사람은 삶의 결이 고요하다. 자기에게 머물렀던 마음을 쉽게 잊지 않고 누가 건넨 따스함이었는지를 세월이 지나도 기억한다. 나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세상이 아직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물건을 보관하는 방식이 아니라 마음의 온도를 품는 방식이며 그 온도가 오늘의 나를 만들어낸다.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은 말을 간직하는 일이다. 말은 형체가 없지만 마음을 스치고 지나갈 때 미세한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을 무시하지 않고 조심스레 꺼내어 ‘이 말은 이런 빛깔이었지’ 하고 떠올리는 사람은 결국 자기 삶을 정갈한 방식으로 가꾸어온 사람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고맙다는 인사를 마음속에서 오래 되뇌는 일이며 누군가의 손길을 잊지 않는 일이다. 그 잊지 않은 마음은 언젠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따스한 기도로 다시 태어난다.


나는 많은 음식을 삶의 은유로 기억한다. 오래 묵은 장아찌는 사람의 마음을, 갓 지은 밥은 새로 시작되는 인연을 닮았다. 달래의 향은 조심스레 스며드는 호의 같고 노각의 질감은 한 사람의 오래된 성품 같다. 사람을 향한 고마움은 이 음식들의 맛처럼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쌓여 나를 구성한다. 내가 받은 마음 하나하나가 지금의 나를 부드럽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 음식을 기억하고 음식을 떠올릴 때마다 사람을 떠올린다. 그 기억이 내 안에서 여전히 뜨겁고 살아있다.


어떤 인연은 짧게 지나가도 오래 남는다. 순간의 배려가 한 사람의 하루를 바꾸고 아주 작은 친절이 마음의 깊은 우물 속에서 잔잔한 물결을 일으킨다.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은 곧 그 사람의 태도이고 인생의 방향이다. 그 방향이 고요하고 부드럽다면 그 사람은 삶을 잘 건너온 사람이다. 나는 그런 마음을 따르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살아가며 우리는 많은 자리에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진다. 그러나 어떤 이는 흐려지지 않는다. 아주 사소한 배려 하나, 무심한 듯 건넨 따스한 말 하나로 마음의 창문을 열어준 사람들.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고 한 행동이 아니었기에 더 오래 기억되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오래 안고 산다. 기억 속에서 그들은 시간과 함께 더 단단한 향을 띠며 나를 정직하게 만든다.


사람을 오래 기억하는 일은 대가가 없고 목적이 없다. 그저 내가 받은 마음이 귀해서 나 역시 귀하게 다루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래서 나는 작은 고마움도 마음에 단단히 묶어두고 그 마음을 다룰 때마다 내 삶의 온도가 조금 더 따스해진다는 것을 안다.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사랑의 또 다른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음식처럼 사람을 기억한다. 달래 한 움큼을 건네던 손길, 장아찌 한 병을 들고 오던 발걸음, 밭에서 뽑아다 준 시금치의 흙 냄새. 이 모든 것이 머릿속의 작은 서랍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사람이 준 마음은 그 서랍 속에서 발효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향을 더해 나에게 돌아온다. 나는 그 향을 잊지 못한다. 그 향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오늘 나는 다시 장아찌 한 조각을 꺼내 먹는다. 짠맛 뒤에 은근히 남는 단맛처럼 그 조각은 누군가의 오래된 마음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을 기억하는 일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나를 더 부드럽게 한다. 나는 그렇게 오래 기억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하다. 누구에게 보이려 하지 않아도 누구에게 들려주려 하지 않아도 내 삶의 방식이 이미 충분히 나를 말해준다. 나는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깊이 있게 사람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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