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에게 있어서 먹는 행위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먹는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다. 우리는 외부의 생명에서 영양을 빌려와야만 겨우 목숨을 이어간다. 그 의존은 우리의 본질을 폭로하고 우리의 나약함을 증명한다. 세 살까지 젖을 떼지 못했던 나에게 어머니는 마지막 결심처럼 젖꼭지에 연고를 바르고 입에 물리셨다. 나는 그 쓰디쓴 맛을 처음 삼키던 순간 생애 첫 단절을 배웠고 첫 상실을 배웠고 첫 절망을 배웠다. 어머니가 갑자기 나를 밀어내는 것처럼 느껴졌고 내 안의 세계가 한 번 무너졌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이 쓰디쓴 기분과 항구히 맞서며 앞으로의 생을 버텨야 한다는 숨겨진 예고장이었다. 나는 그 절망을 이기려는 듯 오히려 더 세차게 젖을 빨았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이 세계는 달콤함보다 쓴맛으로 시작되는 곳이며 때로는 그 쓴맛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유일한 스승이라는 것을.
어린 나는 그 쓰다 남은 뒷맛을 생애 첫 공포로 기억하고 있고 그 기억은 고통스럽게도 이후 내가 맞닥뜨린 모든 두려움의 원형이 되었다. 인간은 어릴 때의 경험으로 자신의 생애 구조를 배운다. 나는 그 첫 경험으로 이렇게 배웠다. 세상은 나를 언제든 밀어낼 수 있고 나는 그때마다 다시 빨아들여야 살아남는다는 것. 먹는다는 것은 그래서 본능이고 저항이고 생존이었다. 내 유년의 밥상은 이미 전쟁이었고 그 전쟁은 오십이 넘은 지금까지도 내 식탁의 그림자를 이루고 있다.
#2
나는 할아버지와 겸상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아이였다. 둥그런 소반 위에서 우리는 둘이서만 세계를 나누어 가졌다. 할아버지의 밥상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었다. 그건 수많은 학문의 뿌리가 한 그릇에 담긴 강의였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오래된 지혜의 전수였다. 반찬은 계절을 품고 있었고 음식의 순서는 만물의 질서를 닮아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로부터 밥상에서 세계를 배웠다. 밥 한 공기를 먹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땀과 수고가 들어가는지 헤아릴 줄 알아야 하고 밥을 남기는 사람은 자신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결국 음식 앞에서의 태도와 같다고 하셨고 밥을 짓는다는 것은 생명을 다루는 일과 같다고 하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음식 달력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첫바람이 불기 전에 먹어야 하는 나물과 비오는 계절에 먹어야 하는 생선과 바람이 차가워지는 시기에 피어나는 무의 기운. 할아버지는 음식을 통해 시간을 가르쳤고 나는 그 밥상에서 삶의 질서를 배웠다. 어느 음식은 몸을 데우고 어느 음식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느 음식은 죄책감을 잠재우며 어느 음식은 슬픔을 내려놓게 한다는 것을 배웠다. 할아버지의 밥상은 하나의 우주였고 나는 그 우주에서 생을 배우는 작은 존재였다. 음식은 생명이었고 생명은 책임이었고 책임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3
암 수술을 마치고 동위원소 치료를 앞두고 있었을 때 나는 또 다른 종류의 굶주림과 마주했다. 소금도 안 되고 간장도 안 되고 장류는 금지였다. 아무 맛도 없어야 하는 식단. 맛을 잃는다는 것은 삶의 의지를 잃는 일과 유사했다. 치료를 위해 삼박사일 독방에 갇혀 있어야 했고 그 시간 동안 밥을 먹는 시간에만 세 여자가 거실로 나왔다. 식판이 놓인 순간 우리 셋은 동시에 울었다. 밥을 먹어야 살아야 하는데 목구멍이 닫혀 있었다. 우리는 먹기 위해 살아왔다고 믿었지만 그 순간 우리는 깨달았다. 먹는다는 것이 단순히 생존의 욕망이 아니라 인간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셋이서 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여태 먹기 위해 살아온 짐승에 불과했다고. 그 고백은 부끄럽고 동시에 기묘하게 우리를 해방시켰다. 밥 앞에서 울어본 사람만이 안다. 그릇 앞에서 무너지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적나라한 취약성이라는 것을. 식욕은 욕망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잔혹한 바늘이었다. 그 치료의 날들 동안 나는 이 세계에서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다시 배웠다. 음식은 생명을 살리는 동시에 영혼을 드러내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4
같이 밥을 먹자는 말은 인간이 서로에게 내미는 가장 원초적이고 성스러운 초대다. 그것은 생명을 나누는 일이고 영혼의 문턱을 내어주는 일이며 서로의 결핍을 드러내는 용기다. 누군가와 밥을 먹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에 들어가는 일이다. 그 사람의 고독과 아픔과 희망과 좌절을 함께 건너보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밥 같이 먹어요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하지 않는다. 그 말에는 내가 그 사람을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토리노의 거리에서 맞고 있던 늙은 말을 끌어안고 울부짖으며 광인이 된 장면은 늘 내 마음에 남아 있다. 그는 말에 맞는 고통을 대신 짊어지려 했고 그 순간 그는 신에 닿았다. 예수가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눔으로써 생명을 건네주었던 그 오래된 진리가 니체의 울부짖음 안에도 있었다.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흡수하고 생명을 이어받는 직선적이며 신비한 의식이다. 그래서 나는 먹는다는 행위 안에서 종종 영적 떨림을 느낀다. 어두운 마음에도 뜨거운 밥 한 숟가락이 들어오면 기묘하게도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다시 올라온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작은 부활의 순간이다.
#5
먹는다는 행위가 이토록 잔혹하고 성스러운 이유는 그 안에 인간의 결핍이 숨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밥 한 숟가락이 나를 살리고 또 어떤 날은 목구멍에 걸려 삶을 버겁게 만든다. 나는 식탁에서 사랑을 배웠고 상처를 배웠고 절망을 배웠고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웠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내 내면의 어둠과 마주 앉는 일이다. 타인의 온기를 입에 넣으며 내 고독과 맞서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피하지 않고 끝까지 응시하려 한다. 이 응시는 나를 이기게 하는 유일한 방식이고 내가 살아남는 기도이다.
먹는다는 것은 어떤 날에는 고독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 어떤 날에는 고독을 이길 힘을 준다. 밥상 앞에서 울어본 사람만이 안다. 인간의 가장 깊은 상처는 말로가 아니라 음식 앞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나는 써도 먹고 아파도 먹고 상처가 벌어져도 먹고 회복의 날이 와도 먹는다. 먹는다는 것은 내 생의 리듬이고 내 존재의 방식이고 내 영혼의 버티는 힘이다.
#6
그래서 나는 묻는다. 나는 무엇을 먹으며 살아갈 것인가. 누구와 밥을 나눌 것인가. 어떤 테이블에서 어떤 마음으로 숟가락을 들 것인가. 먹는다는 행위는 나를 살리고 다시 죽이고 또다시 살린다. 나는 밥을 지으며 내 안의 고독을 끓이고 삶의 쓴맛을 씻어내고 미래의 희망을 조용히 밥알처럼 한 숟가락씩 퍼 올린다. 이것은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나의 오늘을 붙잡는 오래된 의식이다.
그러나 아직 내 안에는 한 번도 식탁에 올리지 못한 오래된 상처들이 있다. 아직 말하지 못한 기억들이 있고 아직 씹어 삼키지 못한 진실들이 있다. 먹는다는 행위는 어쩌면 이제 그 진실들과 마주 서기 위한 마지막 준비일지도 모른다.
#7
영성은 결국 인간이 가진 가장 깊은 굶주림과 마주하는 일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어떤 허기와 함께 살아왔다. 몸의 허기가 아니라 마음의 허기였다. 밥을 먹어도 가시지 않는 허기, 사랑을 받아도 메워지지 않는 허기, 아무리 기도해도 사라지지 않는 허기였다. 그래서 나는 먹는다는 행위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씹는 소리에 신의 숨결이 담겨 있었고 따뜻한 밥의 온도 안에 나를 붙드는 어떤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었다. 신은 멀리 있지 않았다. 가장 먹먹한 순간 가장 작은 입자로 나를 건드리고 있었다.
먹는다는 것은 나를 이 세계에 붙잡아두는 가장 오래된 그물이다. 인간이 겸손해지는 이유는 먹는다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창조의 연속선에 서 있다는 것을 잠시나마 깨닫기 때문이다. 씨앗이 흙을 뚫고 나오기까지의 어둠과 기다림이 나에게로 흘러 들어오고 햇빛과 바람과 땅의 기억이 나의 세포에 스며들어 나를 살린다. 나는 먹는 순간 창조의 잔해가 아니라 창조의 일부로 존재한다.
예수는 마지막 식탁에서 제자들에게 먹는다는 행위로 사랑을 남겼다. 빵을 떼어 나누는 행위로 한 생명이 다른 생명에게 건너가는 방식의 비밀을 보여주었고 포도주를 전하며 자신의 희생을 영원한 생명의 언어로 번역해주었다. 나는 그 장면을 생각하며 누군가와 밥을 먹을 때마다 문득 떨림을 느낀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숟가락을 들지만 그 숟가락은 사랑과 기억과 용서와 부활의 움직임을 품고 있다. 먹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기도이며 사랑이며 영성이다.
나는 밥을 지으며 기도한다. 뜸이 드는 동안 내 마음의 상처도 잠시 식기를 바라고 밥알이 터지는 순간 내 고집과 두려움도 조금은 무너지기를 바라고 뜨거운 김이 피어오를 때 내 안의 어둠도 함께 허물어지기를 바란다. 이것은 나만의 조용한 성체성사이고 나만의 오래된 기도고 나만이 아는 방식으로의 부활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조금 알겠다. 나는 왜 먹는다는 행위에 이토록 민감했고 이토록 집요하게 마음을 내어주었는지. 먹는다는 것은 나의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었고 내 영성이 다시 숨을 쉬는 유일한 틈이었다. 세상은 나를 상하게 했고 사람들은 나를 찢어놓았고 나는 종종 삶을 견디지 못해 무너졌지만 밥 한 숟가락은 다시 나를 살렸다.
먹는다는 것은 결국 신이 우리 안에 남겨둔 마지막 구원의 방식이다.
그리고 나는 그 구원을 끝까지 씹어 삼키며 살아갈 것이다.